2009년 11월 15일 일요일

공야장이 끝나갑니다..

"爲政"에 들어간다는 신고식 블로그 포스트를 작성한지 2년이 되어서야 5권째인 "공야장(公冶長)"의 마지막 3장을 남겨 놓았습니다. 정말로 저란 인간은 세운 뜻을 독실히 실천하지 못하는 그런 의지박약형 인간인가 봅니다.

 

어떻게 되었던 공야장을 넘어 옹야(雍也)의 28장을 넘어서면 드디어 장기근 선생님의 "논어집주신강" 상권이 끝나게 되네요. 지난 9월 30일에 출간된 "문헌과 해석"에 단국대 함경석 선생님의 신연재인 "배워서 성인이 될 수 있는가?"를 오늘 읽었습니다.

 

장재(張載, 1020 ~ 1078) 선생은 학문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주장했다 합니다.

 

 爲學大益, 在自能變化氣質, 不爾, 卒無所發明, 不得見聖人之奧

학문을 하는 큰 유익은 스스로의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데 있다

그렇지 않으면 끝내 발명(發明)한 것이 없고 성인의 깊은 것을 볼 수 없다

 

- 『張載全書』 (권6 「理窟•學大原上」)

 

아무래도 초학자의 신분으로써 그동안 기질을 바꾸지 못한 점이 저의 과오 같습니다. 성인의 되는 것은 커녕 발명도 없고 기본적으론 경서의 이해도 못 하는 쓸모없는 學者가 되어 가는 느낌에 상당히 두렵기만 합니다.

 

학문이 더디고 힘들때 읽고있는 율곡선생의 "自警文"에 성인자기(聖人自期), 즉 성인이 되는 것으로 스스로 기약한다라고 했지만 결국은 선생의 "격몽요결"에서 처럼 書自書 我自我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다시한번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옮겨온 글]“漢文”에 대한 加藤 徹선생의 小稿 (번역) – 1/2

<원문 작성일: 2009년 6월 12일 @ learningculture.wordpress.com >

 

카토 토오루(加藤 徹) 선생은 일본 메이지 대학의 교수로 우리나라에서는 “貝의 중국인 羊의 중국인”과  “한문의 생활력 (최근 “동양고전에게 길을 묻다”로 재간됨)이란 번역서로 잘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1963년생이면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중국문학, 중국경극 등의 중국문화 전문가로 일본에서 유명하더군요.

 


加藤徹 교수 (사진출처: 카토 토오루 선생의 개인 홈페이지)

 

특히 “貝의 중국인 羊의 중국인”은 읽으면서도 시종일관 무릎을 치며 ‘오 그렇군!’ 을 외치며 너무나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선생에 대한 다양한 글을 언제라도 접하고 싶어지는 것이 애독자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번역한 내용은 월간 문예지 中央公論” 2008년 6월호 특집 중 하나였던 “중국고전의 예지에서 배우다(中国古典の叡智に学ぶ) 중 하나인 “명치유신을 가능케 했던 일본독자의 한문훈독문화(明治維新を可能にした日本独自の漢文訓読文化)”의 일부분 입니다. (써놓고 나니 상당히 복잡해 보이네요)


글의 기본 내용은 일본이 에도시대를 지내면서 한문을 音讀이 아닌 訓讀 그러니까 뜻으로 읽는 방식의 한문 독법을 사용해서 에도 말기에는 “중류층 실무계급”이라는 식자계층이 생겨나게 되었고, 궁극적으론 메이지 유신의 길을 열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번역은 全文이 아니고 그 중 일부입니다. (원문은 PDF로 스캔을 받아놨으니 혹시 필요하신 분은 메일로 요청 주세요)

* 주의: 본 번역내용은 제가 개인적인 관심으로 진행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본의 중앙공론신사 및 저자인 加藤徹 선생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임의로 진행한 내용입니다. 가능하면 개인적으로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

 


명치유신을 가능케 했던 일본독자의 한문훈독문화
(明治維新を可能にした日本独自の漢文訓読文化)

 

1. “오아시”의 어원도 사실은 한문

<중략>

 

 

2. 라틴어와의 차이
동양의 한문은 곧잘 서양의 라틴어와 비교된다. 한문도 라틴어도 권위 있는 고전어로 근대이전의 학술계의 국제어로서의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라틴어와 한문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라틴어는 본질적으로 자연언어이다. 일본어 및 영어와 같이 문자로 읽어도 알 수 있으며 음성을 귀로 듣는 것만으로도 이해가 된다.

 

한문은 다르다. 자연언어로서의 중국어를 토대로 하면서도 기원전 14세기의 갑골문의 시대에서부터 서기언어書記言語로써 특화된 인공언어이다. 눈으로 읽기 위한 언어로서 고도의 완성을 보이는 대상으로, 음성언어로서의 기능을 희생하게 되었다. 한문의 문제와 어법은 간결하다. 센텐스도 짧다. 역으로 말하면 언어학적 리던던시redundancy (용장성冗長性에 의한 여유餘裕)가 결여되어있으며 동음이의어도 많다. 눈으로 글자를 읽는 쪽은 문제가 없지만 귀로 한문을 듣는 것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라틴어는 한문만큼 간결하지 않다. 한문과 다르게 격변화나 활용 등의 리던던시redundancy가 풍부하여 귀로 들을 때도 이해하기가 쉽다. 라틴어를 현대 이탈리아어로 번역해도 길이는 그렇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문을 현대 중국어로 번역하는 경우 조사와 보조사를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원문의 두 배정도의 길이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실제 라틴어로 연설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한문으로는 연설이 불가능하다. 고대 로마에는 회의와 광장 등의 연설을 위한 도시공간이 있었다. 케이사르도 아우구스투스도 청중을 앞에 두고 라틴어로 연설을 했다.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현대까지 서양의 도시문명은 “의회, 연설, 연극”의 세 개의 세트로부터 형성된 연설문화 깊은 관련이 있다.

 

동양에서는 후쿠사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스피치(Speech)에 대해 “연설演說”이라는 단어를 고안하기 전 까지 연설이라는 발상조차 없었다. 서양의 정치가는 연설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연극의 대사를 표본으로 했다. 하지만 동양의 연극, 특히 가무기예나 경극의 대사를 아무리 공부한다고 해도 연설은 불가능하다. 가무기예도 경극도 서양적인 의미로의 연극은 원래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경극京劇”을 참조하기 바란다)

 

삼국지의 조조는 한시 작가로도 일류였으며 제갈공명은 천고의 명문인 “출사표出師表”를 썼다. 하지만 그들도 연설은 가능하지 않았다.

분명히 제갈공명이 쓴 “출사표” 훌륭하다. 중국어로 음독을 하더라도 또 일본으로 훈독을 하더라도 그 메아리는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단지 일본어에 의한 훈독은 차치하고 중국어의 음독을 귀로 듣는 것만으로는 중국인이라 하더라도 내용의 반도 이해할 수 없다. 현대 중국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공명과 동시대의 중국인라 할지라도 역시 그랬다. “출사표”는 대중에게 호소하는 연설은 아니다. “출장 전에 어린 주군(유비의 아들인 유선)에게 바치는 ”공개서간公開書簡“이었다. 만약 공명이 라틴어권의 영웅이었다면 촉한의 백성을 광장에 모아놓고 자국의 대의에 대해 명연설을 남겼을 것이다.

라틴어는 고전언어이지만 현재에도 음성언어로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핀란드국영방송국에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뉴스 프로그램을 지금도 매주 라디오를 통해 방송하고 있다. 라틴어의 습득자라면 듣는 것만으로도 이해가 가능하다

 

한문을 사용하는 라디오 뉴스 방송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TV나 영화와 같이 자막이 흐르지 않는 한, 고전에 정통한 중국인이라 할지라도 한문을 귀로 듣는 것만으로 이해하는 가능하지 않다.


3. 한문과 중국어는 별개이다.

서기언어로 특화된 한문과 구두언어口頭言語인 중국어는 별개이다. 이것은 중국인 스스로가 더 잘 인식하고 있다. 명나라의 조남성(趙南星)의 “笑贊”에 이러한 우스운 내용이 있다. 어떤 수재秀才가 장작을 사려고 생각했다. (여기서 말하는 秀才는 과거의 시험의 첫 단계인 원시院試에 합격한 자를 말함. 일본의 수재의 의미와 다름) 수험공부로 한문에 절여있던 이 수재는 말하는 언어도 완전히 한문이 되어있었다. 길 앞의 한 남자가 팔기위한 장작을 등에 매고 걷고 있었다. 수재는 한문으로 그 남자를 불렀다.

 

荷薪者, 過來 (땔감을 짊어진 자, 이곳으로 오라)

 

“荷薪者“ 한문이지만 ”過來“라는 단어는 중국어이다. 남자는 ”이곳으로 오라“라고 하는 단어밖에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재가 있는 곳으로 갔다. 수재는 가격을 한문으로 적었다.

 

基價幾何 (이 가격은 얼마인가)

 

남자는 “價”라는 단어밖에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가격을 말해 주었다. 수재는 가격을 깍을 심사로 한문으로 말했다.

 

外實而內虛, 煙多而焰小, 請損之 (바깥은 실한데 안쪽은 허하다. 연기가 많이 나고 불꽃이 적다. 청한다. 가격을 깎아 달라)

남자는 수재가 무엇을 말하는지 확실히 알지 못해서 장작을 등에 메고 돌아갔다.

 

<중략 – 일본의 라쿠고(落言)의 유사한 에피소드 내용>

 

당唐의 백락천白樂天은 한시를 지을 때, 가장 먼저 무학無學의 노파에게 읽어 준 뒤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평이平易한 말로 다시 수정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화로 진실은 아니다. 분명히 백락천의 시는 한문 작품치고는 평이한 편이다. 하지만 역시 한문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음독을 귀로 듣는 것만으로는 백퍼센트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 “한문”의 역사는 겨우 3천년

라틴어와 한문에는 또 한가지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본질적으로 음성언어인 라틴어는 세계의 어떤 나라 사람이 공부해도 라틴어이다. 하지만 한문은 나라에 따라 “漢文”이 아닐 수 있다.

 

무릇 한문이라는 단어는 일본어와 한국어에서만 사용된다. 중국인은 한문이라 말하지 않는다. 중국인은 한문을 단순히 고문 또는 문언(文言)이라 한다. 학술용어로는 한문을 “고대한문”이라 부른다. 이것은 “현대한문 (즉 중국어)”의 반대 개념인 것이다.

 

만약 중국어에 한문(한우엔)이라 하면 “한 문제(漢 文帝) 또는 ”한나라 때의 문장“ 등으로 한정된 의미가 된가 (청조시대에는 만주문자에 대해 만문滿文에 대해 한자에 의한 문장을 ”한문漢文“이라 불렀지만, 이것은 일본어의 한문의 의미용법과는 다르다)

 

필자는 2000년에 “한문력漢文力”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다행이 호평을 받아 한국과 중국에도 번역본이 간행되었다. 한국판의 타이틀은 한글의 원문을 일본어로 직역한 “한문의 생활력”으로 “한문”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하지만 중국어 번역은 “무용술(無用術, 중국어 발음은 ”우욘 슈우-)이라 하는 다른 타이틀을 사용했다. 중국어 판의 본문 중에는 일본어의 “한문”은 “고문”이라 번역했다. “한문” 그대로는 중국인에겐 통하지 않는 것이다.

 

한시漢詩도 중국어에는 “구시(舊詩)”라고 한다. 중국어에서 한시라고 말하는 것은 한나라 시대의 시라는 의미로 한정하고 있다. 당시唐詩는 당나라 시대의 시이고 송시宋詩는 송대宋代의 시를 가리키는 것과 같다.

 

실은 일본에도 처음엔 한문이라고 하는 개념은 없었다. 히라가나와 카타카나 등이 보급된 이전은 일본에도 문정을 작성할 때 변체한문變體漢文과 순정한문純正漢文만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옆길로 새는 이야기지만 고대 일본의 “변체한문”을 “한화화문漢化和文”이라 불렀던 것은 漢文化된 和文, 즉 이전의 “화문”이 한문화 된 것이라는 오역을 하기 쉽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서 한문 이전의 화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곧 “변체한문”은 일본만의 것은 아닌 것이다. 조선인도 베트남인도 그리고 중국인에게도 중류계급은 순정한문을 구어풍으로 어지럽힌 변체한문은 순정한문과 다르게 언어학적 리던던시가 풍부해 중국인이 귀로 들어도 이해가 되는 것이다. 중화민국中華民國 시대까지는 전통연극의 대사 또는 서간문 등의 변체한문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졸저-“한문의 소양” 참조)

 

변체한문이든 순정한문이든 일본의 문장이 한문 온리(only)였던 시대에는 이것을 상대화하는 “漢文”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명치시대에 양복이 보급되기 일본에는 “和服”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과 같다. 한문학은 단순히 “문장”이라 한다. 한자는 마나(真名) 즉 “진정한 문자”라 했다. 단순히 재주(才)라고 하면 한문의 학재(學才)를 말하는 것이다. 일부러 “漢”이란 글자를 사용해서 구별할 필요가 생겼다.

 

헤이안 시대 중기, 국풍문화(國風文化)가 일어나 “和漢朗詠集(1013년 정도에 성립)” 과 같은 “和”와 “漢”을 대치하는 개념이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세까지는 국문보다 한문이 고급언어로서 압도적으로 높은 위치가 되었기 때문에 한문의 상대화에는 철저하지 못했다.

에도시대에 들어서서 국학과 난학(네덜란드에서 유래한 서양학의 총칭)이 흥성하였고, 이러한 신흥 학도들은 원래의 학문을 “한학”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한문”이라는 명확한 인식은 국학과 난학이 발흥한 에도시대 중기에 되어서야 간신히 확립된 것이다.

[옮겨온 글]춘기석적대제

<원문 작성일: 2009년 5월 15일 @ learningculture.wordpress.com >

 

오늘은 공부자탄강 2560년을 기념하는 “춘기석적대제”일입니다. 하필이면 아침부터 비가 왔네요. 지난 주에 직원들에게 전체 메일을 보내서 “석전대제(釋奠大祭)”에 함께 가자고 제안 했는데, 외국인 직원들은 대부분 함께 가고 내국인 직원은 오히려 좀 시큰둥 하더군요.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었음에도 “기독교” 신자들은 반색을 했습니다. (음…)

 

저는 작년 가을의 추기석전대제에 처음 참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제안한 것이죠. (절대 사장의 입장에서 명령한 것은 아니랍니다 :) Deibu님이 촬영한 IMG_8836.
비 내리는 문묘 (Photo by Dave Jansen)

 

Deibu님이 촬영한 IMG_8833.
문묘의 Daniel (Photo by Dave Jansen)

 

Deibu님이 촬영한 IMG_8810.
비 내리는 문묘 (Photo by Dave Jansen)

 

두 대의 차에 나눠 타고 비 오는 한강을 지나 성대에 도착하니 마침 제례가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비가오니 참석자가 작년 가을의 반도 안되는 규모였습니다. 작년엔 후원금을 내는 것을 몰라 준비를 못했지만 이번엔 직원들도 많이 데려가고 행사가 끝나면 음식도 먹을 생각을 하니 작은 돈이라도 후원해야 할 것 같더군요.

 

Deibu님이 촬영한 IMG_8785.
비 내리는 대성전 (Photo by Dave Jansen)

 

Deibu님이 촬영한 IMG_8778.
카메라맨 (Photo by Dave Jansen)

 

문묘제례에서 빠질 수 없는 팔일무(八佾舞)는 언제 봐도 아름답습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팔일무를 공연하는 학생들은 성균관대 학생이 아니고 세종대 무용과 학생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틀리면 말씀해 주세요 :)

 

DSC00045
DSC00046
DSC00048
DSC00049
Deibu님이 촬영한 IMG_8813.
Deibu님이 촬영한 IMG_8818.
Deibu님이 촬영한 IMG_8804.
Deibu님이 촬영한 IMG_8794.

 

작년 추기석적에서 보다는 남학생 무용수가 많이 보이네요.

또, 문묘제례악은 얼마나 청아하던지, 참 듣기 좋았습니다. 흔히 알고 있는 “궁상각치우”의 5음음계가 아닌, 중국의 7음음계로 되어 있으며 악기도 국악기는 배제되고 중국에서 전래된 악기만 사용한다고 하네요. 중국에서 최근에 복원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몇몇 자료를 보니 한국에서만 유일하게 보존되고 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라 합니다.

 

Deibu님이 촬영한 IMG_8846.

Deibu님이 촬영한 IMG_8845.

 

2시간이 약간 넘는 복잡한 제례가 끝나고 문묘 옆의 결혼회관에서 제공해 주는 음식(언제나 갈비탕)을 맛있게 먹고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

 

벌써 추기석전대제가 기다려 지네요 :)

[옮겨온 글]통문관에 다녀왔어요 (2/2)

<원문 작성일: 2009년 5월 11일 @ learningculture.wordpress.com >

 

1편에도 사용된 사진과 같이 보통 인사동의 고서점은 그림과 같이 사진을 쌓아 놓습니다. 원래 한적이란 것이 현대의 책처럼 세워 놓기보다는 눕혀 놓는 것이 맞는 것 같네요. 아래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책 사이에 라벨이 끼워져 있습니다. 책 제목인 것이죠. 제대로 책을 찾으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답니다.

 

사진의 백인 아가씨는 어떤 책을 찾고 있었을 까요? :)

   통문관한적

 

중간쯤 내려 가니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이 있었습니다. “孔夫子聖蹟圖”였죠. 몇 달 전에 한글로 번역된 책을 구매하긴 했지만 내용이 많지 않아 한적이라도 그렇게 비싸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CIMG8915 CIMG8916

 

다시 들어가 책을 빼 보았습니다. (통문관 쇼윈도의 한적은 사장님의 도움이 있어야 꺼낼 수 있답니다) . 흥분된 마음으로 처음 몇 페이지를 보니 다음과 같이 되어 있더군요

 

CIMG9048
孔夫子聖蹟圖序文

 

짧은 한문 실력으로 읽어 보니 “萬曆二十年歲次壬辰十月朔 山東按察司副使奉” 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만력이면 明의 신종의 연호이고 임진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입니다. 산동의 어떤 안찰사부사가 아마 중앙정부의 누군가에게 봉(奉)하기 위해 만든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명대에는 지방관리의 뇌물성 출판이 꽤 있다고 하네요. (자세한 내용은 너무나도 흥미진지한 책인 “명말 강남의 출판문화” 를 참고 하세요)

 

‘오 임진년 출판이라면 너무나도 비싸겠다..’라는 생각에 가격을 물어보니 “15만원”이라는 말을 듣고 완전 흥분된 목소리로 “계산해 주세요”라고 외쳤고 바로 날아 갈듯한 마음으로 통문관을 나왔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온 저는 흥분을 가라 앉히고 좀 차근차근 책장을 넘겨보았습니다. 근데 생각보다 삽화의 질이 좀 떨어지는 느낌이 들더군요.

 

CIMG8917
CIMG8918
CIMG8921

 

그래서 “공자성적도-김기주, 황지원, 이기훈 역주”를 다시 읽어보니 이런 내용이 나오더군요.

 

그런데 명대 ‘만력연간萬曆年間’ (1573~1619)에 이르면 “공자성적도”의 종류가 100여편으로 늘어난다. 이당시 간행된 판본에 그려진 그림의 내용들 역시 ‘정통본 공자성적도’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대신에 그림이나 내용들이 많이 추가되었다. 이는 당시 화가들이나 판각을 하는 인쇄공들이 창작한 것들로서, 옛날 판본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림이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그렇군..’이라며 별 생각을 하지 않고 책장을 계속 넘겨보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최고의 충격은 마지막 장에서 발생합니다. (두 둥!)

 

image

이런 젠x!

이 책은 일정시대, 그러니까 대정(大正) 13년 즉 1924년에 인쇄 (흑흑..)된 책이었습니다. 출판소는 경성부 병목정 140번지, 지금의 중구 쌍림동이랍니다. 발행인은 차규범씨였습니다.

 

실제 인터넷에서 한적 공부자성적도를 찾아보니, 동일한 책이 몇 권 발견 되더군요. 다른 책들도 대부분 15만원 선이었습니다. 머 실제 책의 가격을 따지는 편이 아닌데다, 고서적을 재테크로 활용하고자 하는 생각이 아니었지만 잠시라도 흥분되었던 몇 시간 전의 스스로의 모습이 우습기만 합니다.

 

아무튼 혹시 공부자성적도에 관심있는 분을 위해 스캔 이미지를 몇 장 올려 놓겠습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

 

image
image
image
image
image
image
image
image
image

[옮겨온 글]통문관에 다녀왔어요 (1/2)

<원문 작성일: 2009년 5월 1일 @ learningculture.wordpress.com >

 

인사동에 몇 남아있지 않은 고서점은 어찌나 그렇게 일찍 문을 닫는지, 언제나 윈도우 쇼핑만 가능했던 내겐 고서점에 전시된 책들은 마치 전람회의 유리관 속 박제 같은 존재 일뿐이었다.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추운 겨울밤 유리창 너머에 전시되어 있는 맛있는 음식을 바라보는 그런 분위기..)

 

원래 오늘 방문의 목적은 아트선재에서 열리고 있는 “진심(ZineSim)” 전시였다. 주차를 하고 풍문여고 쪽으로 걸어 인사동 초입에 거의 다 왔을 때, 그토록 한번 가보고 싶던 “통문관(通文館)”이 눈에 딱 들어왔다. 관광객의 거리가 되어버린 인사동에 유난히 고독해 보이는 점포. 한 두 시간 있는 동안 손님이라곤 나를 제외한 2명.

 

통문관
인사동 통문관 (출처: 한문과 우리 생활 블로그)

 

현관에서 주인이 계시는 가장 안쪽까지 서가가 양쪽으로 나란히 서 있고 대부분 영인본이지만 한적(漢籍)도 상당량이 쌓여져 있었다. 사실 고서적으로써의 한적의 멋을 부정할 순 없지만, 요즘 즐겨 구매하고 있는 인터넷의 학선재에서 신품으로 살수 있다는 것 때문에 굳이 욕심을 내지 않게 되었다. (또, 비싸기도 하고..)


통문관 대표 이종운씨 (출처: 덕성여대신문 – 2009. 03. 04)

 

[옮겨온 글]효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오륜행실도에서)

<원문 작성일: 2007년 12월 12일 @ learningculture.wordpress.com >

 

오늘은 두 명의 효자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조선 정조 21년(1797년)에 왕명으로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본하여 이병모(李秉模) 등이 간행하고 철종 10년 (1859년)에 교서감에서 중간한 책으로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오륜(五倫)에 모밤이 되는 150인의 행적을 적고 그 옆에 그림을 첨가한 책입니다.

 

활자본은 호암미술관과 서울대학교 등 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서울대학교의 규장각 온라인 사이트에 가 보시면 스캔을 잘 받아 논 PDF문서로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진정한 인터넷 강국의 힘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

 

물론 원본이기 때문에 한문을 해독 하셔야 하는데, 다행이 언해문이 첨부되어 있긴 하지만 17, 18 세기 한글이라 좀 해석이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오륜행실도는 책으로도 많이 간행되어 있으니 참고 하시길 바랍니다. 조금 두껍기는 하지만 제가 추천하는 책은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역주 오륜행실도"입니다.

오늘의 첫 번째 인물은 "자로부미(子路負米)"라는 고사성어로 유명한 효자 자로의 이야기 입니다. 자로(子路)는 공자의 제자로서 이름은 주유(仲由)라고 합니다. 원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子路負米 (列國 魯)

仲由字子路 孔子弟子 事親至孝
家貧 食藜藿之食 爲親負米 於百里之外
親歿之後 南遊於楚 從車百乘 積粟萬鍾 累茵而坐 列鼎而食

乃歎曰 雖欲食黎藿之食 爲親負米 不可得也
孔子聞之曰 由也可謂生事盡力 死親盡思者也

 

자로가 쌀을 지다

 

자로의 이름은 중유(仲由)이며 공자의 제자이다.
부모 섬기기에 효도를 다했다. 집이 가난하여 명아주(
)와 콩잎()같은 나물 음식을 먹으며, 부모를 위해 백리 밖에서 쌀을 지고 왔다.

 

부모가 돌아가진 후에, 남쪽의 초나라에서 벼슬을 할 때 뒤따른 수레가 일백이고, 수많은 곡식을 쌓아 두고, 자리는 몇 겹으로 깔고 앉았으며, 음식을 짓는 솥이 줄을 지어 놓았다. 이에 중유가 탄식하여 말하길 "비록 나물 음식을 먹고 부모를 위해 쌀을 지기를 원하지만 가히 이루지 못하겠다."

 

공자께서 이를 듣고 말씀하시길, "중유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섬김에 힘을 다 하였고,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섬김에 사모(思慕)하길 다 했다라고 할 수 있다" 라고 하시었다.

명아주()나 콩잎()은 가난하여 쌀을 구할 수 없는 농민들이 주로 먹던 나물로 자로는 부모님께 나물음식만 해 드린 것이 죄송스러워 매일 백리 밖에서 쌀을 지어 나르는 일을 하고 그 삯으로 부모는 봉양 했다 하네요. (언젠가 인터넷에서 이 고사성어를 검색하니 고등학교 학생을 위한 고사성어 사이트에 자로의 이야기 아래의 리플에 이렇게 적혀 있어서 한 참 웃은 일이 있습니다. "오~ 대단하네요 그런데 그냥 택배로 보내면 안될까요?")

 

부모님이 돌아 가신 후, 초나라의 공직에 있을 때는 대단한 재산을 갖게 되었는데, 자로가 탄식하며 "오히려 나쁜 음식을 먹으면서 쌀을 지어 나르더라도 부모님이 계셨으면 하지만 그럴 수 없구나"라고 했답니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자로가 이렇게 덧붙여 말 했답니다.

 

"양친의 수명은 흰 말이 달려 지나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 부모님을 생각하는 자로의 마음이 정말 애달프기 그지 없습니다. 저는 서울대에서 간행한 "역주 오륜행실도"를 한문공부를 위해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학습이라는 것 보다 더 소중한 것을 알게 해 준 이 책을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조가 가히 왕명으로 간행할 만한 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자로부미의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는 "고어도곡(皐魚道哭)"입니다.

皐魚道哭 (列國 楚)

孔子出行 聞有哭聲甚悲 至則皐魚也 被褐擁劍 哭於路左
孔子下車而問其故 對曰 吾小好學 周流天下而吾親死

夫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往而不可反者年也
逝而不可追者親也 吾於是辭矣 立哭而死
於是孔子之門人 歸養親者 一十三人

 

고어가 길에서 울다

공자께서 나가실 때에 심히 슬픈 울음소리를 들어 그곳에 가 보니 고어(皐魚)라는 사람이었다. 베옷(상복)을 입고 칼을 안고 길가에서 울고있어서 공자께서 수레에서 내려오셔서 그 연고를 물으시니, 대답하기를, "저는 어려서 학문을 좋아해 천하를 두루 다녔지만 저의 부모가 돌아가셨습니다. 무릇 나무는 고요히 있기를 원하지만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부모를 효양(孝養)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리지 않으니, 가면 돌아오지 않는 것은 세월이요, 돌아가셨음에도 쫓아 갈 수 없는 것이 부모이니, 내가 여기서 죽고자 합니다." 그리고 서서 울다가 죽었다.

 

이에 공자 제자가 부모에게 돌아가서 봉양을 하니 그 수가 열세 사람이었다.

스승이었던 공자를 뒤로하고 부모를 뵈러 갔다니, 아마 당시의 13명의 제자는 그 일을 겪고 크게 깨우친 바가 있었을 겁니다. 결국은 그 짧은 세월 동안 부모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겠지요. 물론 당시 13제자의 부모님은 오히려 "내 걱정 말고 공부에만 전념하거라"라고 타일러 다시 공자에게 그 자식을 공자에게 보내지 않았을 까요?

 

언젠가 탤런트 박원숙씨가 아침 방송에 출연해서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생각이 나네요. 홀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것으로 잘 알려진 그녀에게 진행자가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입니까?’란 질문에 그녀는 ‘금은보화와 화려한 음식을 대접하는 것처럼 거창한 것이 아니고 살아 계실 때, 짜장면이라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효도이다.’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신체를 잘 간수하고 함부로 헤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입신하고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것이 효의 끝이라 했지만 그보다도 살아 계실 때 작은 것 하나라도 정성을 다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네요.

 

결국, 모든 행동의 근본은 "효()"에서 시작한다는 공자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매일 매일 안부를 묻고 좋지 않은 음식이라도 부모님과 함께 하는 것이 더 지극한 효행이라 생각 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제사를 지내 실 때 마다 목이 메어서 축문을 잘 읽지 못하시던 저희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 할 것 같습니다.

[옮겨온 글]죽어서야 그칠 수 있음을…

<원문 작성일: 2007년 11월 17일 @ learningculture.wordpress.com >

 

지난해 서울의 한 한문 교습회에서 나는 처음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배웠다. 율곡 이이가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며 그의 어머니셨던 신사임당는 누구인지, 아마 한국에서 중,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을 것이다. 실제 오천 원 권 지폐에도 그가 나와있으니 우리 민족에 있어서 그의 중요성은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격몽요결은 그의 나이 42세 (서기 1577년, 선조 10년)에 그가 해주(海州)에 머무를 때 학생 1, 2 명이 늘 따라와 학문에 관해 물었을 때, 스스로 스승이 될 수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또 처음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의 향방을 잡을 수 있도록 돕고자 책을 "격몽요결"을 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공부를 하는 내내, ‘이것이야 말로 정말 멋진 내용이로군!"이란 생각을 했지만 요즘처럼 논어, 대학을 공부하고 있는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학습의 지침이 되어주었다. 그러한 율곡 이이 선생이 그의 나이 16세에 그토록 사랑하단 어머니 사임당 신씨를 여의고 무려 시묘(侍墓)살이 3년을 마친 19세에 금강산에 입산, 불가에 귀의 하고자 했다 한다. 일여 년을 불경공부에 몰입하다가 20세가 된 서기 1555년에 다시 강릉으로 돌아와 스스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자경문(自警文)을 짓게된다.

 

일종의 ‘결심의 글’인 자경문은 스스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언제나 몰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약관 20세의 나이의 소년 이이의 결심을 들어 보자. (해석 출처: ‘율곡선생 글모음, 자경문, 천도책 – 임동석 옮김, 을유문화사, 2004년)

 

 

先須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未了
먼저 모름지기 그 뜻을 크게 가져 성인의 경지에까지 가는 것을 준칙(準則)으로 삼아 털끝만큼이라도 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心定者言寡 定心自寡言始
마음이 정해진 자는 말이 적어진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정하는 데는 말을 적게 하는 것으로 시발(始發)을 해야 한다.

 

時然後言 則言不得不簡
말을 해야 할 때 말을 한다면 그 말은 결국 간략하지 않으면 안된다.

 

久放之心 一朝收之 得力豈可容易 心是活物 定力未成 則搖動難安 若思慮紛擾時 作意厭惡 欲絶之 則愈覺紛擾 숙起忽滅 似不由我 假使斷絶 只此斷絶之念 橫在胸中 此亦妄念也 當於紛擾時 收斂精神 輕輕照管 勿與之俱往 用功之久 必有凝定之時 執事專一 此亦定心功夫

오랫동안 풀어 놓았던 마음을 일조(一朝)에 거두어 힘을 얻는다는 것이 그 어찌 용이(容易)하랴? 마음은 곧 살아 있는 것이어서 힘을 안정시키기에 실패하면 요동(搖動)이 일어 편안하기 어렵게 되나니 만약 사려(思慮)가 어지러울 때 염오(厭惡)의 생각이 들어 이를 끊어 버리려 한다면 오히려 더욱더 어지러움(紛擾)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함을 느끼게 되어 마치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듯 여기게 된다.
설사 끊는다 하더라도 다만 그 끊었다는 사실 자체가 흉중(胸中)에 가로놓여 있게 되어, 또한 허망(虛亡)스럽게 되고 마는 법이다. 어지러움에 당했을 때엔 정신을 수렵(收斂)하여 조용히 조관(照管)하여 그 자체에 더불어 끌려 다니지 말 것이로다.
이러한 면에 오랫동안 공부(功夫)를 들이면 끝내 안정(凝定)되고 때를 얻어 일을 집행함에 전일(專一)하게 되나니, 이 역시 마음을 안정시키는 단련법(功夫)이니라.

 

常以戒懼謹獨意思 存諸胸中 念念不怠 則一切邪念 自然不起
항상 계구(戒懼)하고 혼자 있을 때를 근신(謹愼)하는 뜻을 가슴속에 지닌 채 늘 생각하여 게으르지 않으면 일체의 사념(邪念)이 저절로 일어나지 못하느라

 

萬惡 皆從不謹獨生
만 가지 악(惡)은 모두가 근독(謹獨)하지 않음을 좇아 일어나느리라

 

謹獨然後 可知浴沂詠歸之意味
근독(謹獨) 한 후에야 욕기영귀(浴沂詠歸)의 의미를 알 수 있다.

 

曉起 思朝之所爲之事 食後 思晝之所爲之事 就寢時 思明日所爲之事 無事則放下 有事則必思 得處置合宜之道 然後讀書 讀書者 求辨是非 施之行事也 若不省事 兀然讀書 則爲無用之學
새벽에 일어나서는 아침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식후에는 낮에 해야 햘 일을 생각하며 취침 시에는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 일이 없으면 그만이려니와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합당하고 의당한 도리에서 처리할 것을 생각한다. 그런 후에 글을 읽어야 하니, 글 읽음에는 시비(是非)를 구분하여 이를 행사(行事)에 베풀지니라.
만약 일을 살피지 않고 올연(兀然)히 글만 읽는다면 이는 소용없는 학문을 하는 것이니라.

 

財利榮利 雖得掃除其念 若處事時 有一毫擇便宜之念 則此亦利心也 尤可省察
재리(財利)와 영리(榮利)는 비록 그 생각을 쓸어 제거한다 할지라도, 만약 일에 처했을 때에 일호(一毫)라도 편의(便宜)의 쪽을 택한다면 이 또한 이(利)에 대한 마음이 있는 것이니 더욱더 성찰 할 것이로다.

 

凡遇事至 若可爲之事 則盡誠爲之 不可有厭倦之心 不可爲之事 則一切截斷 不可使是非交戰於胸中
무릇 일을 만나 만약 할 만한 일에 이르러서는 곧 설실(誠實)을 다하여 이를 처리할 것이며, 염증(厭症)을 내거나 권태(倦怠)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常以行一不義 殺一不辜 得天下不可爲底意思 存諸胸中
항상 불의를 한 번만 행하고, 무고한 자를 한 번만 죽이고 천하를 얻는다 할지라도 이를 행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슴 속에 간직할 지니라.

 

橫逆之來 自反而深省 以感化爲期
횡역(橫逆)이 다가오면 스스로 반성하고 깊이 성찰(省察)하여 감화(感化)로써 기약(期約)을 삼을지니라.

 

一家之人不化 只是誠意未盡
한 집안 사람이 교화되지 않음은 이는 곧 성의를 다하지 않았음이니라.

 

非夜眠及疾病 則不可偃臥 不可跛倚 雖中夜 無睡思 則不臥 但不可拘迫 晝有睡思 當喚醒 此心 十分猛醒 眼皮若重 起而周步 使之惺惺
밤잠이나 질병이 아니라면 눕지 아니하며 비스듬히 기대지도 아니하며 비록 밤중일지라도 졸립다는 생각이 없으면 눕지 아니하며, 다만 억지로는 말 것이니라. 낮에 좋음이 오면 마땅히 정신을 깨우쳐야 하며 졸음이 그래도 십분 맹렬하여 눈을 뜨려 해도 눈꺼풀이 무거운 듯하면 일어나 몇 바퀴 걸어 다녀서 잠이 달아나도록 하여야 한다.

 

用功不緩不急 死而後已 若求速其效 則此亦利心 若不如此 戮辱遺體 便非人子
공부에 힘쓰되 느리게도 급하게도 말며 죽은 뒤에야 그치리라는 생각으로 한다. 만약 그 효과가 빨리 드러나기를 바란다면 이 또한 이심(利心)이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 다면 이는 부모께 받은 몸을 육욕 하는 것이니 곳 사람의 아들이라 할 수 없느니라.

 

그의 자경문을 읽는 사람이라면 아마 저절로 ‘나는 20세에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는가?’라는 생각을 했을 법 하다. 우리의 20세라면 이성을 만났을 것이고, 동성 친구들과의 우정을 쌓기도 했을 것이며 (주로 음주가무를 이용하여) 대학을 다니건 다니지 않건 스스로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당시 소년 이이는 어찌 보면 비정 하리만큼 스스로를 경계하고 자칫 흐트러질 수 있는 자신을 항상 채찍질 했던 것이다.

 

특히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공부’와 달리 율곡 이이 선생님은 ‘평생 학습’을 말씀하셨다. 자경문의 가장 마지막 구절을 보면 "공부에 힘쓰되 느리게도 급하게도 말며 죽은 뒤에야 그치리라는 생각으로 한다"라고 하셨다. 그가 차용하신 사이후이(死而後已)는 논어의 태백(泰伯)편의 7장 내용으로 다음과 같다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증자가 말씀하셨다.
"선비는 마임으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이 무겁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仁)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삼으니 무겁지 않은가. 죽은 뒤에야 끝나니 멀지 않은가."

 

율곡 선생은 위의 문구를 인용함으로써 "공부에는 끝이 없다" 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들어본 "평생교육"의 가장 충격적이고 강한 표현이 바로 "죽어야 끝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요즘 같이 취업을 위해서,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또는 취학을 위해서만 공부하는 우리들의 자세와는 자못 다른 모습에 머리가 숙여진다. 남들이 알아 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공부"인 것 같다.


유교의 최고 경전인 "논어"의 시작이 학(
)으로 시작하는 것이 바로 평생 해야만 하는 공부가 그토록 중요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공자께서는 첫 번째 장에서 배우는 것 자체가 기쁜 것이고 또, 같은 뜻으로 배우는 친구가 있다면 즐겁다고 말씀하셨으며 마지막으로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기분 나빠하지 말 것을 당부 하신 이유가 평생학습의 중요함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지 않을까 생각 한다.

 

이번 포스트의 제목 좀 서늘하게 "죽어서야 그칠 수 있음을…"로 시작했지만 성인의 말씀의 논리전개의 꼬리를 물어 한 바퀴를 돌아 보니 다음과 같다.


결국 죽어서야 그칠 수 있는 것은 즐거움이니 제목 또한 밝기만 하다. 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