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작성일: 2007년 11월 17일 @ learningculture.wordpress.com >
지난해 서울의 한 한문 교습회에서 나는 처음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배웠다. 율곡 이이가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며 그의 어머니셨던 신사임당는 누구인지, 아마 한국에서 중,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을 것이다. 실제 오천 원 권 지폐에도 그가 나와있으니 우리 민족에 있어서 그의 중요성은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격몽요결은 그의 나이 42세 (서기 1577년, 선조 10년)에 그가 해주(海州)에 머무를 때 학생 1, 2 명이 늘 따라와 학문에 관해 물었을 때, 스스로 스승이 될 수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또 처음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의 향방을 잡을 수 있도록 돕고자 책을 "격몽요결"을 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공부를 하는 내내, ‘이것이야 말로 정말 멋진 내용이로군!"이란 생각을 했지만 요즘처럼 논어, 대학을 공부하고 있는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학습의 지침이 되어주었다. 그러한 율곡 이이 선생이 그의 나이 16세에 그토록 사랑하단 어머니 사임당 신씨를 여의고 무려 시묘(侍墓)살이 3년을 마친 19세에 금강산에 입산, 불가에 귀의 하고자 했다 한다. 일여 년을 불경공부에 몰입하다가 20세가 된 서기 1555년에 다시 강릉으로 돌아와 스스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자경문(自警文)을 짓게된다.
일종의 ‘결심의 글’인 자경문은 스스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언제나 몰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약관 20세의 나이의 소년 이이의 결심을 들어 보자. (해석 출처: ‘율곡선생 글모음, 자경문, 천도책 – 임동석 옮김, 을유문화사, 2004년)
先須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未了 心定者言寡 定心自寡言始 時然後言 則言不得不簡 久放之心 一朝收之 得力豈可容易 心是活物 定力未成 則搖動難安 若思慮紛擾時 作意厭惡 欲絶之 則愈覺紛擾 숙起忽滅 似不由我 假使斷絶 只此斷絶之念 橫在胸中 此亦妄念也 當於紛擾時 收斂精神 輕輕照管 勿與之俱往 用功之久 必有凝定之時 執事專一 此亦定心功夫 오랫동안 풀어 놓았던 마음을 일조(一朝)에 거두어 힘을 얻는다는 것이 그 어찌 용이(容易)하랴? 마음은 곧 살아 있는 것이어서 힘을 안정시키기에 실패하면 요동(搖動)이 일어 편안하기 어렵게 되나니 만약 사려(思慮)가 어지러울 때 염오(厭惡)의 생각이 들어 이를 끊어 버리려 한다면 오히려 더욱더 어지러움(紛擾)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함을 느끼게 되어 마치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듯 여기게 된다. 常以戒懼謹獨意思 存諸胸中 念念不怠 則一切邪念 自然不起 萬惡 皆從不謹獨生 謹獨然後 可知浴沂詠歸之意味 曉起 思朝之所爲之事 食後 思晝之所爲之事 就寢時 思明日所爲之事 無事則放下 有事則必思 得處置合宜之道 然後讀書 讀書者 求辨是非 施之行事也 若不省事 兀然讀書 則爲無用之學 財利榮利 雖得掃除其念 若處事時 有一毫擇便宜之念 則此亦利心也 尤可省察 凡遇事至 若可爲之事 則盡誠爲之 不可有厭倦之心 不可爲之事 則一切截斷 不可使是非交戰於胸中 常以行一不義 殺一不辜 得天下不可爲底意思 存諸胸中 橫逆之來 自反而深省 以感化爲期 一家之人不化 只是誠意未盡 非夜眠及疾病 則不可偃臥 不可跛倚 雖中夜 無睡思 則不臥 但不可拘迫 晝有睡思 當喚醒 此心 十分猛醒 眼皮若重 起而周步 使之惺惺 用功不緩不急 死而後已 若求速其效 則此亦利心 若不如此 戮辱遺體 便非人子
먼저 모름지기 그 뜻을 크게 가져 성인의 경지에까지 가는 것을 준칙(準則)으로 삼아 털끝만큼이라도 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마음이 정해진 자는 말이 적어진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정하는 데는 말을 적게 하는 것으로 시발(始發)을 해야 한다.
말을 해야 할 때 말을 한다면 그 말은 결국 간략하지 않으면 안된다.
설사 끊는다 하더라도 다만 그 끊었다는 사실 자체가 흉중(胸中)에 가로놓여 있게 되어, 또한 허망(虛亡)스럽게 되고 마는 법이다. 어지러움에 당했을 때엔 정신을 수렵(收斂)하여 조용히 조관(照管)하여 그 자체에 더불어 끌려 다니지 말 것이로다.
이러한 면에 오랫동안 공부(功夫)를 들이면 끝내 안정(凝定)되고 때를 얻어 일을 집행함에 전일(專一)하게 되나니, 이 역시 마음을 안정시키는 단련법(功夫)이니라.
항상 계구(戒懼)하고 혼자 있을 때를 근신(謹愼)하는 뜻을 가슴속에 지닌 채 늘 생각하여 게으르지 않으면 일체의 사념(邪念)이 저절로 일어나지 못하느라
만 가지 악(惡)은 모두가 근독(謹獨)하지 않음을 좇아 일어나느리라
근독(謹獨) 한 후에야 욕기영귀(浴沂詠歸)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새벽에 일어나서는 아침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식후에는 낮에 해야 햘 일을 생각하며 취침 시에는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 일이 없으면 그만이려니와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합당하고 의당한 도리에서 처리할 것을 생각한다. 그런 후에 글을 읽어야 하니, 글 읽음에는 시비(是非)를 구분하여 이를 행사(行事)에 베풀지니라.
만약 일을 살피지 않고 올연(兀然)히 글만 읽는다면 이는 소용없는 학문을 하는 것이니라.
재리(財利)와 영리(榮利)는 비록 그 생각을 쓸어 제거한다 할지라도, 만약 일에 처했을 때에 일호(一毫)라도 편의(便宜)의 쪽을 택한다면 이 또한 이(利)에 대한 마음이 있는 것이니 더욱더 성찰 할 것이로다.
무릇 일을 만나 만약 할 만한 일에 이르러서는 곧 설실(誠實)을 다하여 이를 처리할 것이며, 염증(厭症)을 내거나 권태(倦怠)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항상 불의를 한 번만 행하고, 무고한 자를 한 번만 죽이고 천하를 얻는다 할지라도 이를 행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슴 속에 간직할 지니라.
횡역(橫逆)이 다가오면 스스로 반성하고 깊이 성찰(省察)하여 감화(感化)로써 기약(期約)을 삼을지니라.
한 집안 사람이 교화되지 않음은 이는 곧 성의를 다하지 않았음이니라.
밤잠이나 질병이 아니라면 눕지 아니하며 비스듬히 기대지도 아니하며 비록 밤중일지라도 졸립다는 생각이 없으면 눕지 아니하며, 다만 억지로는 말 것이니라. 낮에 좋음이 오면 마땅히 정신을 깨우쳐야 하며 졸음이 그래도 십분 맹렬하여 눈을 뜨려 해도 눈꺼풀이 무거운 듯하면 일어나 몇 바퀴 걸어 다녀서 잠이 달아나도록 하여야 한다.
공부에 힘쓰되 느리게도 급하게도 말며 죽은 뒤에야 그치리라는 생각으로 한다. 만약 그 효과가 빨리 드러나기를 바란다면 이 또한 이심(利心)이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 다면 이는 부모께 받은 몸을 육욕 하는 것이니 곳 사람의 아들이라 할 수 없느니라.
그의 자경문을 읽는 사람이라면 아마 저절로 ‘나는 20세에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는가?’라는 생각을 했을 법 하다. 우리의 20세라면 이성을 만났을 것이고, 동성 친구들과의 우정을 쌓기도 했을 것이며 (주로 음주가무를 이용하여) 대학을 다니건 다니지 않건 스스로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당시 소년 이이는 어찌 보면 비정 하리만큼 스스로를 경계하고 자칫 흐트러질 수 있는 자신을 항상 채찍질 했던 것이다.
특히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공부’와 달리 율곡 이이 선생님은 ‘평생 학습’을 말씀하셨다. 자경문의 가장 마지막 구절을 보면 "공부에 힘쓰되 느리게도 급하게도 말며 죽은 뒤에야 그치리라는 생각으로 한다"라고 하셨다. 그가 차용하신 사이후이(死而後已)는 논어의 태백(泰伯)편의 7장 내용으로 다음과 같다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
율곡 선생은 위의 문구를 인용함으로써 "공부에는 끝이 없다" 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들어본 "평생교육"의 가장 충격적이고 강한 표현이 바로 "죽어야 끝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요즘 같이 취업을 위해서,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또는 취학을 위해서만 공부하는 우리들의 자세와는 자못 다른 모습에 머리가 숙여진다. 남들이 알아 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공부"인 것 같다.
유교의 최고 경전인 "논어"의 시작이 학(學)으로 시작하는 것이 바로 평생 해야만 하는 공부가 그토록 중요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공자께서는 첫 번째 장에서 배우는 것 자체가 기쁜 것이고 또, 같은 뜻으로 배우는 친구가 있다면 즐겁다고 말씀하셨으며 마지막으로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기분 나빠하지 말 것을 당부 하신 이유가 평생학습의 중요함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지 않을까 생각 한다.
이번 포스트의 제목 좀 서늘하게 "죽어서야 그칠 수 있음을…"로 시작했지만 성인의 말씀의 논리전개의 꼬리를 물어 한 바퀴를 돌아 보니 다음과 같다.
결국 죽어서야 그칠 수 있는 것은 즐거움이니 제목 또한 밝기만 하다.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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