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유교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유교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09년 11월 15일 일요일

[옮겨온 글]효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오륜행실도에서)

<원문 작성일: 2007년 12월 12일 @ learningculture.wordpress.com >

 

오늘은 두 명의 효자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조선 정조 21년(1797년)에 왕명으로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본하여 이병모(李秉模) 등이 간행하고 철종 10년 (1859년)에 교서감에서 중간한 책으로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오륜(五倫)에 모밤이 되는 150인의 행적을 적고 그 옆에 그림을 첨가한 책입니다.

 

활자본은 호암미술관과 서울대학교 등 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서울대학교의 규장각 온라인 사이트에 가 보시면 스캔을 잘 받아 논 PDF문서로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진정한 인터넷 강국의 힘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

 

물론 원본이기 때문에 한문을 해독 하셔야 하는데, 다행이 언해문이 첨부되어 있긴 하지만 17, 18 세기 한글이라 좀 해석이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오륜행실도는 책으로도 많이 간행되어 있으니 참고 하시길 바랍니다. 조금 두껍기는 하지만 제가 추천하는 책은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역주 오륜행실도"입니다.

오늘의 첫 번째 인물은 "자로부미(子路負米)"라는 고사성어로 유명한 효자 자로의 이야기 입니다. 자로(子路)는 공자의 제자로서 이름은 주유(仲由)라고 합니다. 원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子路負米 (列國 魯)

仲由字子路 孔子弟子 事親至孝
家貧 食藜藿之食 爲親負米 於百里之外
親歿之後 南遊於楚 從車百乘 積粟萬鍾 累茵而坐 列鼎而食

乃歎曰 雖欲食黎藿之食 爲親負米 不可得也
孔子聞之曰 由也可謂生事盡力 死親盡思者也

 

자로가 쌀을 지다

 

자로의 이름은 중유(仲由)이며 공자의 제자이다.
부모 섬기기에 효도를 다했다. 집이 가난하여 명아주(
)와 콩잎()같은 나물 음식을 먹으며, 부모를 위해 백리 밖에서 쌀을 지고 왔다.

 

부모가 돌아가진 후에, 남쪽의 초나라에서 벼슬을 할 때 뒤따른 수레가 일백이고, 수많은 곡식을 쌓아 두고, 자리는 몇 겹으로 깔고 앉았으며, 음식을 짓는 솥이 줄을 지어 놓았다. 이에 중유가 탄식하여 말하길 "비록 나물 음식을 먹고 부모를 위해 쌀을 지기를 원하지만 가히 이루지 못하겠다."

 

공자께서 이를 듣고 말씀하시길, "중유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섬김에 힘을 다 하였고,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섬김에 사모(思慕)하길 다 했다라고 할 수 있다" 라고 하시었다.

명아주()나 콩잎()은 가난하여 쌀을 구할 수 없는 농민들이 주로 먹던 나물로 자로는 부모님께 나물음식만 해 드린 것이 죄송스러워 매일 백리 밖에서 쌀을 지어 나르는 일을 하고 그 삯으로 부모는 봉양 했다 하네요. (언젠가 인터넷에서 이 고사성어를 검색하니 고등학교 학생을 위한 고사성어 사이트에 자로의 이야기 아래의 리플에 이렇게 적혀 있어서 한 참 웃은 일이 있습니다. "오~ 대단하네요 그런데 그냥 택배로 보내면 안될까요?")

 

부모님이 돌아 가신 후, 초나라의 공직에 있을 때는 대단한 재산을 갖게 되었는데, 자로가 탄식하며 "오히려 나쁜 음식을 먹으면서 쌀을 지어 나르더라도 부모님이 계셨으면 하지만 그럴 수 없구나"라고 했답니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자로가 이렇게 덧붙여 말 했답니다.

 

"양친의 수명은 흰 말이 달려 지나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 부모님을 생각하는 자로의 마음이 정말 애달프기 그지 없습니다. 저는 서울대에서 간행한 "역주 오륜행실도"를 한문공부를 위해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학습이라는 것 보다 더 소중한 것을 알게 해 준 이 책을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조가 가히 왕명으로 간행할 만한 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자로부미의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는 "고어도곡(皐魚道哭)"입니다.

皐魚道哭 (列國 楚)

孔子出行 聞有哭聲甚悲 至則皐魚也 被褐擁劍 哭於路左
孔子下車而問其故 對曰 吾小好學 周流天下而吾親死

夫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往而不可反者年也
逝而不可追者親也 吾於是辭矣 立哭而死
於是孔子之門人 歸養親者 一十三人

 

고어가 길에서 울다

공자께서 나가실 때에 심히 슬픈 울음소리를 들어 그곳에 가 보니 고어(皐魚)라는 사람이었다. 베옷(상복)을 입고 칼을 안고 길가에서 울고있어서 공자께서 수레에서 내려오셔서 그 연고를 물으시니, 대답하기를, "저는 어려서 학문을 좋아해 천하를 두루 다녔지만 저의 부모가 돌아가셨습니다. 무릇 나무는 고요히 있기를 원하지만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부모를 효양(孝養)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리지 않으니, 가면 돌아오지 않는 것은 세월이요, 돌아가셨음에도 쫓아 갈 수 없는 것이 부모이니, 내가 여기서 죽고자 합니다." 그리고 서서 울다가 죽었다.

 

이에 공자 제자가 부모에게 돌아가서 봉양을 하니 그 수가 열세 사람이었다.

스승이었던 공자를 뒤로하고 부모를 뵈러 갔다니, 아마 당시의 13명의 제자는 그 일을 겪고 크게 깨우친 바가 있었을 겁니다. 결국은 그 짧은 세월 동안 부모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겠지요. 물론 당시 13제자의 부모님은 오히려 "내 걱정 말고 공부에만 전념하거라"라고 타일러 다시 공자에게 그 자식을 공자에게 보내지 않았을 까요?

 

언젠가 탤런트 박원숙씨가 아침 방송에 출연해서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생각이 나네요. 홀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것으로 잘 알려진 그녀에게 진행자가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입니까?’란 질문에 그녀는 ‘금은보화와 화려한 음식을 대접하는 것처럼 거창한 것이 아니고 살아 계실 때, 짜장면이라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효도이다.’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신체를 잘 간수하고 함부로 헤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입신하고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것이 효의 끝이라 했지만 그보다도 살아 계실 때 작은 것 하나라도 정성을 다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네요.

 

결국, 모든 행동의 근본은 "효()"에서 시작한다는 공자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매일 매일 안부를 묻고 좋지 않은 음식이라도 부모님과 함께 하는 것이 더 지극한 효행이라 생각 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제사를 지내 실 때 마다 목이 메어서 축문을 잘 읽지 못하시던 저희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 할 것 같습니다.

[옮겨온 글]죽어서야 그칠 수 있음을…

<원문 작성일: 2007년 11월 17일 @ learningculture.wordpress.com >

 

지난해 서울의 한 한문 교습회에서 나는 처음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배웠다. 율곡 이이가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며 그의 어머니셨던 신사임당는 누구인지, 아마 한국에서 중,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을 것이다. 실제 오천 원 권 지폐에도 그가 나와있으니 우리 민족에 있어서 그의 중요성은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격몽요결은 그의 나이 42세 (서기 1577년, 선조 10년)에 그가 해주(海州)에 머무를 때 학생 1, 2 명이 늘 따라와 학문에 관해 물었을 때, 스스로 스승이 될 수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또 처음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의 향방을 잡을 수 있도록 돕고자 책을 "격몽요결"을 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공부를 하는 내내, ‘이것이야 말로 정말 멋진 내용이로군!"이란 생각을 했지만 요즘처럼 논어, 대학을 공부하고 있는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학습의 지침이 되어주었다. 그러한 율곡 이이 선생이 그의 나이 16세에 그토록 사랑하단 어머니 사임당 신씨를 여의고 무려 시묘(侍墓)살이 3년을 마친 19세에 금강산에 입산, 불가에 귀의 하고자 했다 한다. 일여 년을 불경공부에 몰입하다가 20세가 된 서기 1555년에 다시 강릉으로 돌아와 스스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자경문(自警文)을 짓게된다.

 

일종의 ‘결심의 글’인 자경문은 스스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언제나 몰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약관 20세의 나이의 소년 이이의 결심을 들어 보자. (해석 출처: ‘율곡선생 글모음, 자경문, 천도책 – 임동석 옮김, 을유문화사, 2004년)

 

 

先須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未了
먼저 모름지기 그 뜻을 크게 가져 성인의 경지에까지 가는 것을 준칙(準則)으로 삼아 털끝만큼이라도 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心定者言寡 定心自寡言始
마음이 정해진 자는 말이 적어진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정하는 데는 말을 적게 하는 것으로 시발(始發)을 해야 한다.

 

時然後言 則言不得不簡
말을 해야 할 때 말을 한다면 그 말은 결국 간략하지 않으면 안된다.

 

久放之心 一朝收之 得力豈可容易 心是活物 定力未成 則搖動難安 若思慮紛擾時 作意厭惡 欲絶之 則愈覺紛擾 숙起忽滅 似不由我 假使斷絶 只此斷絶之念 橫在胸中 此亦妄念也 當於紛擾時 收斂精神 輕輕照管 勿與之俱往 用功之久 必有凝定之時 執事專一 此亦定心功夫

오랫동안 풀어 놓았던 마음을 일조(一朝)에 거두어 힘을 얻는다는 것이 그 어찌 용이(容易)하랴? 마음은 곧 살아 있는 것이어서 힘을 안정시키기에 실패하면 요동(搖動)이 일어 편안하기 어렵게 되나니 만약 사려(思慮)가 어지러울 때 염오(厭惡)의 생각이 들어 이를 끊어 버리려 한다면 오히려 더욱더 어지러움(紛擾)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함을 느끼게 되어 마치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듯 여기게 된다.
설사 끊는다 하더라도 다만 그 끊었다는 사실 자체가 흉중(胸中)에 가로놓여 있게 되어, 또한 허망(虛亡)스럽게 되고 마는 법이다. 어지러움에 당했을 때엔 정신을 수렵(收斂)하여 조용히 조관(照管)하여 그 자체에 더불어 끌려 다니지 말 것이로다.
이러한 면에 오랫동안 공부(功夫)를 들이면 끝내 안정(凝定)되고 때를 얻어 일을 집행함에 전일(專一)하게 되나니, 이 역시 마음을 안정시키는 단련법(功夫)이니라.

 

常以戒懼謹獨意思 存諸胸中 念念不怠 則一切邪念 自然不起
항상 계구(戒懼)하고 혼자 있을 때를 근신(謹愼)하는 뜻을 가슴속에 지닌 채 늘 생각하여 게으르지 않으면 일체의 사념(邪念)이 저절로 일어나지 못하느라

 

萬惡 皆從不謹獨生
만 가지 악(惡)은 모두가 근독(謹獨)하지 않음을 좇아 일어나느리라

 

謹獨然後 可知浴沂詠歸之意味
근독(謹獨) 한 후에야 욕기영귀(浴沂詠歸)의 의미를 알 수 있다.

 

曉起 思朝之所爲之事 食後 思晝之所爲之事 就寢時 思明日所爲之事 無事則放下 有事則必思 得處置合宜之道 然後讀書 讀書者 求辨是非 施之行事也 若不省事 兀然讀書 則爲無用之學
새벽에 일어나서는 아침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식후에는 낮에 해야 햘 일을 생각하며 취침 시에는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 일이 없으면 그만이려니와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합당하고 의당한 도리에서 처리할 것을 생각한다. 그런 후에 글을 읽어야 하니, 글 읽음에는 시비(是非)를 구분하여 이를 행사(行事)에 베풀지니라.
만약 일을 살피지 않고 올연(兀然)히 글만 읽는다면 이는 소용없는 학문을 하는 것이니라.

 

財利榮利 雖得掃除其念 若處事時 有一毫擇便宜之念 則此亦利心也 尤可省察
재리(財利)와 영리(榮利)는 비록 그 생각을 쓸어 제거한다 할지라도, 만약 일에 처했을 때에 일호(一毫)라도 편의(便宜)의 쪽을 택한다면 이 또한 이(利)에 대한 마음이 있는 것이니 더욱더 성찰 할 것이로다.

 

凡遇事至 若可爲之事 則盡誠爲之 不可有厭倦之心 不可爲之事 則一切截斷 不可使是非交戰於胸中
무릇 일을 만나 만약 할 만한 일에 이르러서는 곧 설실(誠實)을 다하여 이를 처리할 것이며, 염증(厭症)을 내거나 권태(倦怠)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常以行一不義 殺一不辜 得天下不可爲底意思 存諸胸中
항상 불의를 한 번만 행하고, 무고한 자를 한 번만 죽이고 천하를 얻는다 할지라도 이를 행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슴 속에 간직할 지니라.

 

橫逆之來 自反而深省 以感化爲期
횡역(橫逆)이 다가오면 스스로 반성하고 깊이 성찰(省察)하여 감화(感化)로써 기약(期約)을 삼을지니라.

 

一家之人不化 只是誠意未盡
한 집안 사람이 교화되지 않음은 이는 곧 성의를 다하지 않았음이니라.

 

非夜眠及疾病 則不可偃臥 不可跛倚 雖中夜 無睡思 則不臥 但不可拘迫 晝有睡思 當喚醒 此心 十分猛醒 眼皮若重 起而周步 使之惺惺
밤잠이나 질병이 아니라면 눕지 아니하며 비스듬히 기대지도 아니하며 비록 밤중일지라도 졸립다는 생각이 없으면 눕지 아니하며, 다만 억지로는 말 것이니라. 낮에 좋음이 오면 마땅히 정신을 깨우쳐야 하며 졸음이 그래도 십분 맹렬하여 눈을 뜨려 해도 눈꺼풀이 무거운 듯하면 일어나 몇 바퀴 걸어 다녀서 잠이 달아나도록 하여야 한다.

 

用功不緩不急 死而後已 若求速其效 則此亦利心 若不如此 戮辱遺體 便非人子
공부에 힘쓰되 느리게도 급하게도 말며 죽은 뒤에야 그치리라는 생각으로 한다. 만약 그 효과가 빨리 드러나기를 바란다면 이 또한 이심(利心)이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 다면 이는 부모께 받은 몸을 육욕 하는 것이니 곳 사람의 아들이라 할 수 없느니라.

 

그의 자경문을 읽는 사람이라면 아마 저절로 ‘나는 20세에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는가?’라는 생각을 했을 법 하다. 우리의 20세라면 이성을 만났을 것이고, 동성 친구들과의 우정을 쌓기도 했을 것이며 (주로 음주가무를 이용하여) 대학을 다니건 다니지 않건 스스로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당시 소년 이이는 어찌 보면 비정 하리만큼 스스로를 경계하고 자칫 흐트러질 수 있는 자신을 항상 채찍질 했던 것이다.

 

특히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공부’와 달리 율곡 이이 선생님은 ‘평생 학습’을 말씀하셨다. 자경문의 가장 마지막 구절을 보면 "공부에 힘쓰되 느리게도 급하게도 말며 죽은 뒤에야 그치리라는 생각으로 한다"라고 하셨다. 그가 차용하신 사이후이(死而後已)는 논어의 태백(泰伯)편의 7장 내용으로 다음과 같다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증자가 말씀하셨다.
"선비는 마임으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이 무겁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仁)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삼으니 무겁지 않은가. 죽은 뒤에야 끝나니 멀지 않은가."

 

율곡 선생은 위의 문구를 인용함으로써 "공부에는 끝이 없다" 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들어본 "평생교육"의 가장 충격적이고 강한 표현이 바로 "죽어야 끝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요즘 같이 취업을 위해서,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또는 취학을 위해서만 공부하는 우리들의 자세와는 자못 다른 모습에 머리가 숙여진다. 남들이 알아 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공부"인 것 같다.


유교의 최고 경전인 "논어"의 시작이 학(
)으로 시작하는 것이 바로 평생 해야만 하는 공부가 그토록 중요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공자께서는 첫 번째 장에서 배우는 것 자체가 기쁜 것이고 또, 같은 뜻으로 배우는 친구가 있다면 즐겁다고 말씀하셨으며 마지막으로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기분 나빠하지 말 것을 당부 하신 이유가 평생학습의 중요함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지 않을까 생각 한다.

 

이번 포스트의 제목 좀 서늘하게 "죽어서야 그칠 수 있음을…"로 시작했지만 성인의 말씀의 논리전개의 꼬리를 물어 한 바퀴를 돌아 보니 다음과 같다.


결국 죽어서야 그칠 수 있는 것은 즐거움이니 제목 또한 밝기만 하다. 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