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15일 일요일

공야장이 끝나갑니다..

"爲政"에 들어간다는 신고식 블로그 포스트를 작성한지 2년이 되어서야 5권째인 "공야장(公冶長)"의 마지막 3장을 남겨 놓았습니다. 정말로 저란 인간은 세운 뜻을 독실히 실천하지 못하는 그런 의지박약형 인간인가 봅니다.

 

어떻게 되었던 공야장을 넘어 옹야(雍也)의 28장을 넘어서면 드디어 장기근 선생님의 "논어집주신강" 상권이 끝나게 되네요. 지난 9월 30일에 출간된 "문헌과 해석"에 단국대 함경석 선생님의 신연재인 "배워서 성인이 될 수 있는가?"를 오늘 읽었습니다.

 

장재(張載, 1020 ~ 1078) 선생은 학문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주장했다 합니다.

 

 爲學大益, 在自能變化氣質, 不爾, 卒無所發明, 不得見聖人之奧

학문을 하는 큰 유익은 스스로의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데 있다

그렇지 않으면 끝내 발명(發明)한 것이 없고 성인의 깊은 것을 볼 수 없다

 

- 『張載全書』 (권6 「理窟•學大原上」)

 

아무래도 초학자의 신분으로써 그동안 기질을 바꾸지 못한 점이 저의 과오 같습니다. 성인의 되는 것은 커녕 발명도 없고 기본적으론 경서의 이해도 못 하는 쓸모없는 學者가 되어 가는 느낌에 상당히 두렵기만 합니다.

 

학문이 더디고 힘들때 읽고있는 율곡선생의 "自警文"에 성인자기(聖人自期), 즉 성인이 되는 것으로 스스로 기약한다라고 했지만 결국은 선생의 "격몽요결"에서 처럼 書自書 我自我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다시한번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옮겨온 글]“漢文”에 대한 加藤 徹선생의 小稿 (번역) – 1/2

<원문 작성일: 2009년 6월 12일 @ learningculture.wordpress.com >

 

카토 토오루(加藤 徹) 선생은 일본 메이지 대학의 교수로 우리나라에서는 “貝의 중국인 羊의 중국인”과  “한문의 생활력 (최근 “동양고전에게 길을 묻다”로 재간됨)이란 번역서로 잘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1963년생이면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중국문학, 중국경극 등의 중국문화 전문가로 일본에서 유명하더군요.

 


加藤徹 교수 (사진출처: 카토 토오루 선생의 개인 홈페이지)

 

특히 “貝의 중국인 羊의 중국인”은 읽으면서도 시종일관 무릎을 치며 ‘오 그렇군!’ 을 외치며 너무나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선생에 대한 다양한 글을 언제라도 접하고 싶어지는 것이 애독자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번역한 내용은 월간 문예지 中央公論” 2008년 6월호 특집 중 하나였던 “중국고전의 예지에서 배우다(中国古典の叡智に学ぶ) 중 하나인 “명치유신을 가능케 했던 일본독자의 한문훈독문화(明治維新を可能にした日本独自の漢文訓読文化)”의 일부분 입니다. (써놓고 나니 상당히 복잡해 보이네요)


글의 기본 내용은 일본이 에도시대를 지내면서 한문을 音讀이 아닌 訓讀 그러니까 뜻으로 읽는 방식의 한문 독법을 사용해서 에도 말기에는 “중류층 실무계급”이라는 식자계층이 생겨나게 되었고, 궁극적으론 메이지 유신의 길을 열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번역은 全文이 아니고 그 중 일부입니다. (원문은 PDF로 스캔을 받아놨으니 혹시 필요하신 분은 메일로 요청 주세요)

* 주의: 본 번역내용은 제가 개인적인 관심으로 진행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본의 중앙공론신사 및 저자인 加藤徹 선생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임의로 진행한 내용입니다. 가능하면 개인적으로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

 


명치유신을 가능케 했던 일본독자의 한문훈독문화
(明治維新を可能にした日本独自の漢文訓読文化)

 

1. “오아시”의 어원도 사실은 한문

<중략>

 

 

2. 라틴어와의 차이
동양의 한문은 곧잘 서양의 라틴어와 비교된다. 한문도 라틴어도 권위 있는 고전어로 근대이전의 학술계의 국제어로서의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라틴어와 한문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라틴어는 본질적으로 자연언어이다. 일본어 및 영어와 같이 문자로 읽어도 알 수 있으며 음성을 귀로 듣는 것만으로도 이해가 된다.

 

한문은 다르다. 자연언어로서의 중국어를 토대로 하면서도 기원전 14세기의 갑골문의 시대에서부터 서기언어書記言語로써 특화된 인공언어이다. 눈으로 읽기 위한 언어로서 고도의 완성을 보이는 대상으로, 음성언어로서의 기능을 희생하게 되었다. 한문의 문제와 어법은 간결하다. 센텐스도 짧다. 역으로 말하면 언어학적 리던던시redundancy (용장성冗長性에 의한 여유餘裕)가 결여되어있으며 동음이의어도 많다. 눈으로 글자를 읽는 쪽은 문제가 없지만 귀로 한문을 듣는 것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라틴어는 한문만큼 간결하지 않다. 한문과 다르게 격변화나 활용 등의 리던던시redundancy가 풍부하여 귀로 들을 때도 이해하기가 쉽다. 라틴어를 현대 이탈리아어로 번역해도 길이는 그렇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문을 현대 중국어로 번역하는 경우 조사와 보조사를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원문의 두 배정도의 길이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실제 라틴어로 연설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한문으로는 연설이 불가능하다. 고대 로마에는 회의와 광장 등의 연설을 위한 도시공간이 있었다. 케이사르도 아우구스투스도 청중을 앞에 두고 라틴어로 연설을 했다.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현대까지 서양의 도시문명은 “의회, 연설, 연극”의 세 개의 세트로부터 형성된 연설문화 깊은 관련이 있다.

 

동양에서는 후쿠사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스피치(Speech)에 대해 “연설演說”이라는 단어를 고안하기 전 까지 연설이라는 발상조차 없었다. 서양의 정치가는 연설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연극의 대사를 표본으로 했다. 하지만 동양의 연극, 특히 가무기예나 경극의 대사를 아무리 공부한다고 해도 연설은 불가능하다. 가무기예도 경극도 서양적인 의미로의 연극은 원래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경극京劇”을 참조하기 바란다)

 

삼국지의 조조는 한시 작가로도 일류였으며 제갈공명은 천고의 명문인 “출사표出師表”를 썼다. 하지만 그들도 연설은 가능하지 않았다.

분명히 제갈공명이 쓴 “출사표” 훌륭하다. 중국어로 음독을 하더라도 또 일본으로 훈독을 하더라도 그 메아리는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단지 일본어에 의한 훈독은 차치하고 중국어의 음독을 귀로 듣는 것만으로는 중국인이라 하더라도 내용의 반도 이해할 수 없다. 현대 중국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공명과 동시대의 중국인라 할지라도 역시 그랬다. “출사표”는 대중에게 호소하는 연설은 아니다. “출장 전에 어린 주군(유비의 아들인 유선)에게 바치는 ”공개서간公開書簡“이었다. 만약 공명이 라틴어권의 영웅이었다면 촉한의 백성을 광장에 모아놓고 자국의 대의에 대해 명연설을 남겼을 것이다.

라틴어는 고전언어이지만 현재에도 음성언어로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핀란드국영방송국에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뉴스 프로그램을 지금도 매주 라디오를 통해 방송하고 있다. 라틴어의 습득자라면 듣는 것만으로도 이해가 가능하다

 

한문을 사용하는 라디오 뉴스 방송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TV나 영화와 같이 자막이 흐르지 않는 한, 고전에 정통한 중국인이라 할지라도 한문을 귀로 듣는 것만으로 이해하는 가능하지 않다.


3. 한문과 중국어는 별개이다.

서기언어로 특화된 한문과 구두언어口頭言語인 중국어는 별개이다. 이것은 중국인 스스로가 더 잘 인식하고 있다. 명나라의 조남성(趙南星)의 “笑贊”에 이러한 우스운 내용이 있다. 어떤 수재秀才가 장작을 사려고 생각했다. (여기서 말하는 秀才는 과거의 시험의 첫 단계인 원시院試에 합격한 자를 말함. 일본의 수재의 의미와 다름) 수험공부로 한문에 절여있던 이 수재는 말하는 언어도 완전히 한문이 되어있었다. 길 앞의 한 남자가 팔기위한 장작을 등에 매고 걷고 있었다. 수재는 한문으로 그 남자를 불렀다.

 

荷薪者, 過來 (땔감을 짊어진 자, 이곳으로 오라)

 

“荷薪者“ 한문이지만 ”過來“라는 단어는 중국어이다. 남자는 ”이곳으로 오라“라고 하는 단어밖에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재가 있는 곳으로 갔다. 수재는 가격을 한문으로 적었다.

 

基價幾何 (이 가격은 얼마인가)

 

남자는 “價”라는 단어밖에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가격을 말해 주었다. 수재는 가격을 깍을 심사로 한문으로 말했다.

 

外實而內虛, 煙多而焰小, 請損之 (바깥은 실한데 안쪽은 허하다. 연기가 많이 나고 불꽃이 적다. 청한다. 가격을 깎아 달라)

남자는 수재가 무엇을 말하는지 확실히 알지 못해서 장작을 등에 메고 돌아갔다.

 

<중략 – 일본의 라쿠고(落言)의 유사한 에피소드 내용>

 

당唐의 백락천白樂天은 한시를 지을 때, 가장 먼저 무학無學의 노파에게 읽어 준 뒤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평이平易한 말로 다시 수정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화로 진실은 아니다. 분명히 백락천의 시는 한문 작품치고는 평이한 편이다. 하지만 역시 한문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음독을 귀로 듣는 것만으로는 백퍼센트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 “한문”의 역사는 겨우 3천년

라틴어와 한문에는 또 한가지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본질적으로 음성언어인 라틴어는 세계의 어떤 나라 사람이 공부해도 라틴어이다. 하지만 한문은 나라에 따라 “漢文”이 아닐 수 있다.

 

무릇 한문이라는 단어는 일본어와 한국어에서만 사용된다. 중국인은 한문이라 말하지 않는다. 중국인은 한문을 단순히 고문 또는 문언(文言)이라 한다. 학술용어로는 한문을 “고대한문”이라 부른다. 이것은 “현대한문 (즉 중국어)”의 반대 개념인 것이다.

 

만약 중국어에 한문(한우엔)이라 하면 “한 문제(漢 文帝) 또는 ”한나라 때의 문장“ 등으로 한정된 의미가 된가 (청조시대에는 만주문자에 대해 만문滿文에 대해 한자에 의한 문장을 ”한문漢文“이라 불렀지만, 이것은 일본어의 한문의 의미용법과는 다르다)

 

필자는 2000년에 “한문력漢文力”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다행이 호평을 받아 한국과 중국에도 번역본이 간행되었다. 한국판의 타이틀은 한글의 원문을 일본어로 직역한 “한문의 생활력”으로 “한문”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하지만 중국어 번역은 “무용술(無用術, 중국어 발음은 ”우욘 슈우-)이라 하는 다른 타이틀을 사용했다. 중국어 판의 본문 중에는 일본어의 “한문”은 “고문”이라 번역했다. “한문” 그대로는 중국인에겐 통하지 않는 것이다.

 

한시漢詩도 중국어에는 “구시(舊詩)”라고 한다. 중국어에서 한시라고 말하는 것은 한나라 시대의 시라는 의미로 한정하고 있다. 당시唐詩는 당나라 시대의 시이고 송시宋詩는 송대宋代의 시를 가리키는 것과 같다.

 

실은 일본에도 처음엔 한문이라고 하는 개념은 없었다. 히라가나와 카타카나 등이 보급된 이전은 일본에도 문정을 작성할 때 변체한문變體漢文과 순정한문純正漢文만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옆길로 새는 이야기지만 고대 일본의 “변체한문”을 “한화화문漢化和文”이라 불렀던 것은 漢文化된 和文, 즉 이전의 “화문”이 한문화 된 것이라는 오역을 하기 쉽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서 한문 이전의 화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곧 “변체한문”은 일본만의 것은 아닌 것이다. 조선인도 베트남인도 그리고 중국인에게도 중류계급은 순정한문을 구어풍으로 어지럽힌 변체한문은 순정한문과 다르게 언어학적 리던던시가 풍부해 중국인이 귀로 들어도 이해가 되는 것이다. 중화민국中華民國 시대까지는 전통연극의 대사 또는 서간문 등의 변체한문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졸저-“한문의 소양” 참조)

 

변체한문이든 순정한문이든 일본의 문장이 한문 온리(only)였던 시대에는 이것을 상대화하는 “漢文”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명치시대에 양복이 보급되기 일본에는 “和服”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과 같다. 한문학은 단순히 “문장”이라 한다. 한자는 마나(真名) 즉 “진정한 문자”라 했다. 단순히 재주(才)라고 하면 한문의 학재(學才)를 말하는 것이다. 일부러 “漢”이란 글자를 사용해서 구별할 필요가 생겼다.

 

헤이안 시대 중기, 국풍문화(國風文化)가 일어나 “和漢朗詠集(1013년 정도에 성립)” 과 같은 “和”와 “漢”을 대치하는 개념이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세까지는 국문보다 한문이 고급언어로서 압도적으로 높은 위치가 되었기 때문에 한문의 상대화에는 철저하지 못했다.

에도시대에 들어서서 국학과 난학(네덜란드에서 유래한 서양학의 총칭)이 흥성하였고, 이러한 신흥 학도들은 원래의 학문을 “한학”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한문”이라는 명확한 인식은 국학과 난학이 발흥한 에도시대 중기에 되어서야 간신히 확립된 것이다.

[옮겨온 글]춘기석적대제

<원문 작성일: 2009년 5월 15일 @ learningculture.wordpress.com >

 

오늘은 공부자탄강 2560년을 기념하는 “춘기석적대제”일입니다. 하필이면 아침부터 비가 왔네요. 지난 주에 직원들에게 전체 메일을 보내서 “석전대제(釋奠大祭)”에 함께 가자고 제안 했는데, 외국인 직원들은 대부분 함께 가고 내국인 직원은 오히려 좀 시큰둥 하더군요.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었음에도 “기독교” 신자들은 반색을 했습니다. (음…)

 

저는 작년 가을의 추기석전대제에 처음 참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제안한 것이죠. (절대 사장의 입장에서 명령한 것은 아니랍니다 :) Deibu님이 촬영한 IMG_8836.
비 내리는 문묘 (Photo by Dave Jan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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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의 Daniel (Photo by Dave Jan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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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문묘 (Photo by Dave Jansen)

 

두 대의 차에 나눠 타고 비 오는 한강을 지나 성대에 도착하니 마침 제례가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비가오니 참석자가 작년 가을의 반도 안되는 규모였습니다. 작년엔 후원금을 내는 것을 몰라 준비를 못했지만 이번엔 직원들도 많이 데려가고 행사가 끝나면 음식도 먹을 생각을 하니 작은 돈이라도 후원해야 할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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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대성전 (Photo by Dave Jan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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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맨 (Photo by Dave Jansen)

 

문묘제례에서 빠질 수 없는 팔일무(八佾舞)는 언제 봐도 아름답습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팔일무를 공연하는 학생들은 성균관대 학생이 아니고 세종대 무용과 학생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틀리면 말씀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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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추기석적에서 보다는 남학생 무용수가 많이 보이네요.

또, 문묘제례악은 얼마나 청아하던지, 참 듣기 좋았습니다. 흔히 알고 있는 “궁상각치우”의 5음음계가 아닌, 중국의 7음음계로 되어 있으며 악기도 국악기는 배제되고 중국에서 전래된 악기만 사용한다고 하네요. 중국에서 최근에 복원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몇몇 자료를 보니 한국에서만 유일하게 보존되고 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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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이 약간 넘는 복잡한 제례가 끝나고 문묘 옆의 결혼회관에서 제공해 주는 음식(언제나 갈비탕)을 맛있게 먹고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

 

벌써 추기석전대제가 기다려 지네요 :)

[옮겨온 글]통문관에 다녀왔어요 (2/2)

<원문 작성일: 2009년 5월 11일 @ learningculture.wordpress.com >

 

1편에도 사용된 사진과 같이 보통 인사동의 고서점은 그림과 같이 사진을 쌓아 놓습니다. 원래 한적이란 것이 현대의 책처럼 세워 놓기보다는 눕혀 놓는 것이 맞는 것 같네요. 아래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책 사이에 라벨이 끼워져 있습니다. 책 제목인 것이죠. 제대로 책을 찾으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답니다.

 

사진의 백인 아가씨는 어떤 책을 찾고 있었을 까요? :)

   통문관한적

 

중간쯤 내려 가니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이 있었습니다. “孔夫子聖蹟圖”였죠. 몇 달 전에 한글로 번역된 책을 구매하긴 했지만 내용이 많지 않아 한적이라도 그렇게 비싸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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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어가 책을 빼 보았습니다. (통문관 쇼윈도의 한적은 사장님의 도움이 있어야 꺼낼 수 있답니다) . 흥분된 마음으로 처음 몇 페이지를 보니 다음과 같이 되어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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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夫子聖蹟圖序文

 

짧은 한문 실력으로 읽어 보니 “萬曆二十年歲次壬辰十月朔 山東按察司副使奉” 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만력이면 明의 신종의 연호이고 임진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입니다. 산동의 어떤 안찰사부사가 아마 중앙정부의 누군가에게 봉(奉)하기 위해 만든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명대에는 지방관리의 뇌물성 출판이 꽤 있다고 하네요. (자세한 내용은 너무나도 흥미진지한 책인 “명말 강남의 출판문화” 를 참고 하세요)

 

‘오 임진년 출판이라면 너무나도 비싸겠다..’라는 생각에 가격을 물어보니 “15만원”이라는 말을 듣고 완전 흥분된 목소리로 “계산해 주세요”라고 외쳤고 바로 날아 갈듯한 마음으로 통문관을 나왔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온 저는 흥분을 가라 앉히고 좀 차근차근 책장을 넘겨보았습니다. 근데 생각보다 삽화의 질이 좀 떨어지는 느낌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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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공자성적도-김기주, 황지원, 이기훈 역주”를 다시 읽어보니 이런 내용이 나오더군요.

 

그런데 명대 ‘만력연간萬曆年間’ (1573~1619)에 이르면 “공자성적도”의 종류가 100여편으로 늘어난다. 이당시 간행된 판본에 그려진 그림의 내용들 역시 ‘정통본 공자성적도’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대신에 그림이나 내용들이 많이 추가되었다. 이는 당시 화가들이나 판각을 하는 인쇄공들이 창작한 것들로서, 옛날 판본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림이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그렇군..’이라며 별 생각을 하지 않고 책장을 계속 넘겨보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최고의 충격은 마지막 장에서 발생합니다. (두 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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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젠x!

이 책은 일정시대, 그러니까 대정(大正) 13년 즉 1924년에 인쇄 (흑흑..)된 책이었습니다. 출판소는 경성부 병목정 140번지, 지금의 중구 쌍림동이랍니다. 발행인은 차규범씨였습니다.

 

실제 인터넷에서 한적 공부자성적도를 찾아보니, 동일한 책이 몇 권 발견 되더군요. 다른 책들도 대부분 15만원 선이었습니다. 머 실제 책의 가격을 따지는 편이 아닌데다, 고서적을 재테크로 활용하고자 하는 생각이 아니었지만 잠시라도 흥분되었던 몇 시간 전의 스스로의 모습이 우습기만 합니다.

 

아무튼 혹시 공부자성적도에 관심있는 분을 위해 스캔 이미지를 몇 장 올려 놓겠습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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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온 글]통문관에 다녀왔어요 (1/2)

<원문 작성일: 2009년 5월 1일 @ learningculture.wordpress.com >

 

인사동에 몇 남아있지 않은 고서점은 어찌나 그렇게 일찍 문을 닫는지, 언제나 윈도우 쇼핑만 가능했던 내겐 고서점에 전시된 책들은 마치 전람회의 유리관 속 박제 같은 존재 일뿐이었다.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추운 겨울밤 유리창 너머에 전시되어 있는 맛있는 음식을 바라보는 그런 분위기..)

 

원래 오늘 방문의 목적은 아트선재에서 열리고 있는 “진심(ZineSim)” 전시였다. 주차를 하고 풍문여고 쪽으로 걸어 인사동 초입에 거의 다 왔을 때, 그토록 한번 가보고 싶던 “통문관(通文館)”이 눈에 딱 들어왔다. 관광객의 거리가 되어버린 인사동에 유난히 고독해 보이는 점포. 한 두 시간 있는 동안 손님이라곤 나를 제외한 2명.

 

통문관
인사동 통문관 (출처: 한문과 우리 생활 블로그)

 

현관에서 주인이 계시는 가장 안쪽까지 서가가 양쪽으로 나란히 서 있고 대부분 영인본이지만 한적(漢籍)도 상당량이 쌓여져 있었다. 사실 고서적으로써의 한적의 멋을 부정할 순 없지만, 요즘 즐겨 구매하고 있는 인터넷의 학선재에서 신품으로 살수 있다는 것 때문에 굳이 욕심을 내지 않게 되었다. (또, 비싸기도 하고..)


통문관 대표 이종운씨 (출처: 덕성여대신문 – 2009. 03. 04)

 

[옮겨온 글]효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오륜행실도에서)

<원문 작성일: 2007년 12월 12일 @ learningculture.wordpress.com >

 

오늘은 두 명의 효자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조선 정조 21년(1797년)에 왕명으로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본하여 이병모(李秉模) 등이 간행하고 철종 10년 (1859년)에 교서감에서 중간한 책으로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오륜(五倫)에 모밤이 되는 150인의 행적을 적고 그 옆에 그림을 첨가한 책입니다.

 

활자본은 호암미술관과 서울대학교 등 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서울대학교의 규장각 온라인 사이트에 가 보시면 스캔을 잘 받아 논 PDF문서로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진정한 인터넷 강국의 힘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

 

물론 원본이기 때문에 한문을 해독 하셔야 하는데, 다행이 언해문이 첨부되어 있긴 하지만 17, 18 세기 한글이라 좀 해석이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오륜행실도는 책으로도 많이 간행되어 있으니 참고 하시길 바랍니다. 조금 두껍기는 하지만 제가 추천하는 책은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역주 오륜행실도"입니다.

오늘의 첫 번째 인물은 "자로부미(子路負米)"라는 고사성어로 유명한 효자 자로의 이야기 입니다. 자로(子路)는 공자의 제자로서 이름은 주유(仲由)라고 합니다. 원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子路負米 (列國 魯)

仲由字子路 孔子弟子 事親至孝
家貧 食藜藿之食 爲親負米 於百里之外
親歿之後 南遊於楚 從車百乘 積粟萬鍾 累茵而坐 列鼎而食

乃歎曰 雖欲食黎藿之食 爲親負米 不可得也
孔子聞之曰 由也可謂生事盡力 死親盡思者也

 

자로가 쌀을 지다

 

자로의 이름은 중유(仲由)이며 공자의 제자이다.
부모 섬기기에 효도를 다했다. 집이 가난하여 명아주(
)와 콩잎()같은 나물 음식을 먹으며, 부모를 위해 백리 밖에서 쌀을 지고 왔다.

 

부모가 돌아가진 후에, 남쪽의 초나라에서 벼슬을 할 때 뒤따른 수레가 일백이고, 수많은 곡식을 쌓아 두고, 자리는 몇 겹으로 깔고 앉았으며, 음식을 짓는 솥이 줄을 지어 놓았다. 이에 중유가 탄식하여 말하길 "비록 나물 음식을 먹고 부모를 위해 쌀을 지기를 원하지만 가히 이루지 못하겠다."

 

공자께서 이를 듣고 말씀하시길, "중유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섬김에 힘을 다 하였고,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섬김에 사모(思慕)하길 다 했다라고 할 수 있다" 라고 하시었다.

명아주()나 콩잎()은 가난하여 쌀을 구할 수 없는 농민들이 주로 먹던 나물로 자로는 부모님께 나물음식만 해 드린 것이 죄송스러워 매일 백리 밖에서 쌀을 지어 나르는 일을 하고 그 삯으로 부모는 봉양 했다 하네요. (언젠가 인터넷에서 이 고사성어를 검색하니 고등학교 학생을 위한 고사성어 사이트에 자로의 이야기 아래의 리플에 이렇게 적혀 있어서 한 참 웃은 일이 있습니다. "오~ 대단하네요 그런데 그냥 택배로 보내면 안될까요?")

 

부모님이 돌아 가신 후, 초나라의 공직에 있을 때는 대단한 재산을 갖게 되었는데, 자로가 탄식하며 "오히려 나쁜 음식을 먹으면서 쌀을 지어 나르더라도 부모님이 계셨으면 하지만 그럴 수 없구나"라고 했답니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자로가 이렇게 덧붙여 말 했답니다.

 

"양친의 수명은 흰 말이 달려 지나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 부모님을 생각하는 자로의 마음이 정말 애달프기 그지 없습니다. 저는 서울대에서 간행한 "역주 오륜행실도"를 한문공부를 위해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학습이라는 것 보다 더 소중한 것을 알게 해 준 이 책을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조가 가히 왕명으로 간행할 만한 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자로부미의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는 "고어도곡(皐魚道哭)"입니다.

皐魚道哭 (列國 楚)

孔子出行 聞有哭聲甚悲 至則皐魚也 被褐擁劍 哭於路左
孔子下車而問其故 對曰 吾小好學 周流天下而吾親死

夫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往而不可反者年也
逝而不可追者親也 吾於是辭矣 立哭而死
於是孔子之門人 歸養親者 一十三人

 

고어가 길에서 울다

공자께서 나가실 때에 심히 슬픈 울음소리를 들어 그곳에 가 보니 고어(皐魚)라는 사람이었다. 베옷(상복)을 입고 칼을 안고 길가에서 울고있어서 공자께서 수레에서 내려오셔서 그 연고를 물으시니, 대답하기를, "저는 어려서 학문을 좋아해 천하를 두루 다녔지만 저의 부모가 돌아가셨습니다. 무릇 나무는 고요히 있기를 원하지만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부모를 효양(孝養)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리지 않으니, 가면 돌아오지 않는 것은 세월이요, 돌아가셨음에도 쫓아 갈 수 없는 것이 부모이니, 내가 여기서 죽고자 합니다." 그리고 서서 울다가 죽었다.

 

이에 공자 제자가 부모에게 돌아가서 봉양을 하니 그 수가 열세 사람이었다.

스승이었던 공자를 뒤로하고 부모를 뵈러 갔다니, 아마 당시의 13명의 제자는 그 일을 겪고 크게 깨우친 바가 있었을 겁니다. 결국은 그 짧은 세월 동안 부모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겠지요. 물론 당시 13제자의 부모님은 오히려 "내 걱정 말고 공부에만 전념하거라"라고 타일러 다시 공자에게 그 자식을 공자에게 보내지 않았을 까요?

 

언젠가 탤런트 박원숙씨가 아침 방송에 출연해서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생각이 나네요. 홀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것으로 잘 알려진 그녀에게 진행자가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입니까?’란 질문에 그녀는 ‘금은보화와 화려한 음식을 대접하는 것처럼 거창한 것이 아니고 살아 계실 때, 짜장면이라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효도이다.’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신체를 잘 간수하고 함부로 헤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입신하고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것이 효의 끝이라 했지만 그보다도 살아 계실 때 작은 것 하나라도 정성을 다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네요.

 

결국, 모든 행동의 근본은 "효()"에서 시작한다는 공자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매일 매일 안부를 묻고 좋지 않은 음식이라도 부모님과 함께 하는 것이 더 지극한 효행이라 생각 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제사를 지내 실 때 마다 목이 메어서 축문을 잘 읽지 못하시던 저희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 할 것 같습니다.

[옮겨온 글]죽어서야 그칠 수 있음을…

<원문 작성일: 2007년 11월 17일 @ learningculture.wordpress.com >

 

지난해 서울의 한 한문 교습회에서 나는 처음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배웠다. 율곡 이이가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며 그의 어머니셨던 신사임당는 누구인지, 아마 한국에서 중,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을 것이다. 실제 오천 원 권 지폐에도 그가 나와있으니 우리 민족에 있어서 그의 중요성은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격몽요결은 그의 나이 42세 (서기 1577년, 선조 10년)에 그가 해주(海州)에 머무를 때 학생 1, 2 명이 늘 따라와 학문에 관해 물었을 때, 스스로 스승이 될 수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또 처음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의 향방을 잡을 수 있도록 돕고자 책을 "격몽요결"을 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공부를 하는 내내, ‘이것이야 말로 정말 멋진 내용이로군!"이란 생각을 했지만 요즘처럼 논어, 대학을 공부하고 있는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학습의 지침이 되어주었다. 그러한 율곡 이이 선생이 그의 나이 16세에 그토록 사랑하단 어머니 사임당 신씨를 여의고 무려 시묘(侍墓)살이 3년을 마친 19세에 금강산에 입산, 불가에 귀의 하고자 했다 한다. 일여 년을 불경공부에 몰입하다가 20세가 된 서기 1555년에 다시 강릉으로 돌아와 스스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자경문(自警文)을 짓게된다.

 

일종의 ‘결심의 글’인 자경문은 스스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언제나 몰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약관 20세의 나이의 소년 이이의 결심을 들어 보자. (해석 출처: ‘율곡선생 글모음, 자경문, 천도책 – 임동석 옮김, 을유문화사, 2004년)

 

 

先須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未了
먼저 모름지기 그 뜻을 크게 가져 성인의 경지에까지 가는 것을 준칙(準則)으로 삼아 털끝만큼이라도 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心定者言寡 定心自寡言始
마음이 정해진 자는 말이 적어진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정하는 데는 말을 적게 하는 것으로 시발(始發)을 해야 한다.

 

時然後言 則言不得不簡
말을 해야 할 때 말을 한다면 그 말은 결국 간략하지 않으면 안된다.

 

久放之心 一朝收之 得力豈可容易 心是活物 定力未成 則搖動難安 若思慮紛擾時 作意厭惡 欲絶之 則愈覺紛擾 숙起忽滅 似不由我 假使斷絶 只此斷絶之念 橫在胸中 此亦妄念也 當於紛擾時 收斂精神 輕輕照管 勿與之俱往 用功之久 必有凝定之時 執事專一 此亦定心功夫

오랫동안 풀어 놓았던 마음을 일조(一朝)에 거두어 힘을 얻는다는 것이 그 어찌 용이(容易)하랴? 마음은 곧 살아 있는 것이어서 힘을 안정시키기에 실패하면 요동(搖動)이 일어 편안하기 어렵게 되나니 만약 사려(思慮)가 어지러울 때 염오(厭惡)의 생각이 들어 이를 끊어 버리려 한다면 오히려 더욱더 어지러움(紛擾)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함을 느끼게 되어 마치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듯 여기게 된다.
설사 끊는다 하더라도 다만 그 끊었다는 사실 자체가 흉중(胸中)에 가로놓여 있게 되어, 또한 허망(虛亡)스럽게 되고 마는 법이다. 어지러움에 당했을 때엔 정신을 수렵(收斂)하여 조용히 조관(照管)하여 그 자체에 더불어 끌려 다니지 말 것이로다.
이러한 면에 오랫동안 공부(功夫)를 들이면 끝내 안정(凝定)되고 때를 얻어 일을 집행함에 전일(專一)하게 되나니, 이 역시 마음을 안정시키는 단련법(功夫)이니라.

 

常以戒懼謹獨意思 存諸胸中 念念不怠 則一切邪念 自然不起
항상 계구(戒懼)하고 혼자 있을 때를 근신(謹愼)하는 뜻을 가슴속에 지닌 채 늘 생각하여 게으르지 않으면 일체의 사념(邪念)이 저절로 일어나지 못하느라

 

萬惡 皆從不謹獨生
만 가지 악(惡)은 모두가 근독(謹獨)하지 않음을 좇아 일어나느리라

 

謹獨然後 可知浴沂詠歸之意味
근독(謹獨) 한 후에야 욕기영귀(浴沂詠歸)의 의미를 알 수 있다.

 

曉起 思朝之所爲之事 食後 思晝之所爲之事 就寢時 思明日所爲之事 無事則放下 有事則必思 得處置合宜之道 然後讀書 讀書者 求辨是非 施之行事也 若不省事 兀然讀書 則爲無用之學
새벽에 일어나서는 아침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식후에는 낮에 해야 햘 일을 생각하며 취침 시에는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 일이 없으면 그만이려니와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합당하고 의당한 도리에서 처리할 것을 생각한다. 그런 후에 글을 읽어야 하니, 글 읽음에는 시비(是非)를 구분하여 이를 행사(行事)에 베풀지니라.
만약 일을 살피지 않고 올연(兀然)히 글만 읽는다면 이는 소용없는 학문을 하는 것이니라.

 

財利榮利 雖得掃除其念 若處事時 有一毫擇便宜之念 則此亦利心也 尤可省察
재리(財利)와 영리(榮利)는 비록 그 생각을 쓸어 제거한다 할지라도, 만약 일에 처했을 때에 일호(一毫)라도 편의(便宜)의 쪽을 택한다면 이 또한 이(利)에 대한 마음이 있는 것이니 더욱더 성찰 할 것이로다.

 

凡遇事至 若可爲之事 則盡誠爲之 不可有厭倦之心 不可爲之事 則一切截斷 不可使是非交戰於胸中
무릇 일을 만나 만약 할 만한 일에 이르러서는 곧 설실(誠實)을 다하여 이를 처리할 것이며, 염증(厭症)을 내거나 권태(倦怠)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常以行一不義 殺一不辜 得天下不可爲底意思 存諸胸中
항상 불의를 한 번만 행하고, 무고한 자를 한 번만 죽이고 천하를 얻는다 할지라도 이를 행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슴 속에 간직할 지니라.

 

橫逆之來 自反而深省 以感化爲期
횡역(橫逆)이 다가오면 스스로 반성하고 깊이 성찰(省察)하여 감화(感化)로써 기약(期約)을 삼을지니라.

 

一家之人不化 只是誠意未盡
한 집안 사람이 교화되지 않음은 이는 곧 성의를 다하지 않았음이니라.

 

非夜眠及疾病 則不可偃臥 不可跛倚 雖中夜 無睡思 則不臥 但不可拘迫 晝有睡思 當喚醒 此心 十分猛醒 眼皮若重 起而周步 使之惺惺
밤잠이나 질병이 아니라면 눕지 아니하며 비스듬히 기대지도 아니하며 비록 밤중일지라도 졸립다는 생각이 없으면 눕지 아니하며, 다만 억지로는 말 것이니라. 낮에 좋음이 오면 마땅히 정신을 깨우쳐야 하며 졸음이 그래도 십분 맹렬하여 눈을 뜨려 해도 눈꺼풀이 무거운 듯하면 일어나 몇 바퀴 걸어 다녀서 잠이 달아나도록 하여야 한다.

 

用功不緩不急 死而後已 若求速其效 則此亦利心 若不如此 戮辱遺體 便非人子
공부에 힘쓰되 느리게도 급하게도 말며 죽은 뒤에야 그치리라는 생각으로 한다. 만약 그 효과가 빨리 드러나기를 바란다면 이 또한 이심(利心)이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 다면 이는 부모께 받은 몸을 육욕 하는 것이니 곳 사람의 아들이라 할 수 없느니라.

 

그의 자경문을 읽는 사람이라면 아마 저절로 ‘나는 20세에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는가?’라는 생각을 했을 법 하다. 우리의 20세라면 이성을 만났을 것이고, 동성 친구들과의 우정을 쌓기도 했을 것이며 (주로 음주가무를 이용하여) 대학을 다니건 다니지 않건 스스로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당시 소년 이이는 어찌 보면 비정 하리만큼 스스로를 경계하고 자칫 흐트러질 수 있는 자신을 항상 채찍질 했던 것이다.

 

특히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공부’와 달리 율곡 이이 선생님은 ‘평생 학습’을 말씀하셨다. 자경문의 가장 마지막 구절을 보면 "공부에 힘쓰되 느리게도 급하게도 말며 죽은 뒤에야 그치리라는 생각으로 한다"라고 하셨다. 그가 차용하신 사이후이(死而後已)는 논어의 태백(泰伯)편의 7장 내용으로 다음과 같다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증자가 말씀하셨다.
"선비는 마임으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이 무겁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仁)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삼으니 무겁지 않은가. 죽은 뒤에야 끝나니 멀지 않은가."

 

율곡 선생은 위의 문구를 인용함으로써 "공부에는 끝이 없다" 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들어본 "평생교육"의 가장 충격적이고 강한 표현이 바로 "죽어야 끝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요즘 같이 취업을 위해서,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또는 취학을 위해서만 공부하는 우리들의 자세와는 자못 다른 모습에 머리가 숙여진다. 남들이 알아 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공부"인 것 같다.


유교의 최고 경전인 "논어"의 시작이 학(
)으로 시작하는 것이 바로 평생 해야만 하는 공부가 그토록 중요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공자께서는 첫 번째 장에서 배우는 것 자체가 기쁜 것이고 또, 같은 뜻으로 배우는 친구가 있다면 즐겁다고 말씀하셨으며 마지막으로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기분 나빠하지 말 것을 당부 하신 이유가 평생학습의 중요함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지 않을까 생각 한다.

 

이번 포스트의 제목 좀 서늘하게 "죽어서야 그칠 수 있음을…"로 시작했지만 성인의 말씀의 논리전개의 꼬리를 물어 한 바퀴를 돌아 보니 다음과 같다.


결국 죽어서야 그칠 수 있는 것은 즐거움이니 제목 또한 밝기만 하다. J

[옮겨온 글]論語學習記: 위정(爲政)으로 들어가면서

<원문 작성일: 2007년 10월 28일 @ learningculture.wordpress.com >

 

논어집주(論語集注)를 시작한지 어언 5개월. 드디어 爲政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전에 어떤 블로그에서 하루에 한 장(章)씩 공부하면 학이(學而)가 16장이니 한 달이면 위정(24장)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내용을 본적이 있습니다. 이런 전 너무 머리가 나쁜 것일까요? 학이만 5개월이니. 언제나 길기만 한 논어집주를 언제나 끝낼지 정말 까마득하군요.

박수동 선생님이 그리신 "오성과 한음"이라는 명령만화를 기억하는 제 나이또래 분들이 계실 겁니다. 오성과 한음이 책 한 권을 끝내면 서당에서 "책씻이"라는 의식이 있었는데 오성이 어머니가 단술을 만들어 서당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장면이 기억 납니다. 겨우 학이를 끝낸 지금 전 그 단술이 너무 마시고 싶네요 J (근데 단술이 머죠? 식혜인가요?)

 

율곡 이이 선생님이 지으신 격몽요결(擊蒙要訣)의 "독서(讀書)"편을 보면

 

先讀小學於事親敬兄忠君弟長隆師親友之道一一詳玩而力行之
次讀大學及惑問於窮理正心修己治人之道一一眞知而實踐之
次讀論語於求仁爲己涵養本源之功一一精思而深體之
次讀孟子於明辨義利遏人慾存天理之設一一明察而擴充之

次讀中庸於性情之德推致之功位育之妙一一玩索而有得焉
次讀詩經於性情之邪正善惡之褒戒一一潛繹感發而懲創之
次讀禮經於天理之節文儀則之度數一一講究而有立焉
次讀書經於二帝三王治天下之大經大法一一領要而遡本焉
次讀易經於吉凶存亡進退消長之幾一一觀玩而窮硏焉
次讀春秋於聖人賞善罰惡抑揚操終之微辭奧義一一精硏而契悟焉

 

五書五經循環熟讀理會不已使義理日明而宋之先正所著之書如近思錄家禮心經二程全書宋子大典語類及他性理之設宜間間精讀使義理常常浸灌吾心無時間斷而餘力亦讀史書通古今達事變以長識見若異端雜類不正之書不可頃刻披閱也

 

凡讀書必熟讀一冊盡曉義趣貫通無疑然後乃改讀他書不可貪多務得忙迫涉獵也


요약하면 우선 배우고자 하는 이(學者)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공부를 해야 한답니다..

 

소학 → 대학 → 논어 → 맹자 → 중용 → 시경 → 예경 → 서경 → 역경 → 춘추

 

위의 5서 5경을 순환숙독 (돌려가며 익숙히 읽기)을 해야 하고, 성리학의 영향이라서 그런지 근사록(近思錄), 가례(家禮), 심경(心經), 이정전서(二程全書), 주자대전(朱子大全), 어류(語類), 및 기타 성리학 관련 서적을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휴~)

여력이 된다면 또, 역사책을 읽어 옛날과 지금에 일어난 일에 통달하여 식견을 신장시켜야 할 것이랍니다. (다행이 史記를 보고 시작했군요.. 하지만 여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단잡류(異端雜類, 성리학자들이니 불교서적이겠죠?)의 책은 잠깐이라도 보지 말아야 한답니다.

무릇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한 책을 익숙히 읽어 그 의취(의취)을 깨달아 꿰뚫어 통달하고 의심이 없은 뒤에야 다시 다른 책을 읽어야 하며, 많이 읽기를 탐하고 얻기를 힘써서 바삐 섭렵(涉獵)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의 공부 방법을 보아하니, 우선 동몽선습과 격몽요결을 읽었다는 건방짐으로 소학은 쉽게 무시해 버리고 주제 넘게 논어집주에 도전 지금까지 고분고투하고 있습니다. 주희(朱熹) 선생님의 자세한 해석모음(集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어리석어 내용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므로 우연히 헌책방에서 대학장구(大學章句)을 구매하여 짧은 경문(經文)만 읽었습니다. 그나마 경문을 읽고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이르는 내용을 요약하고 컨닝 페이퍼로 쓰고 나니 논어집주 볼 때 좀 도움이 되더군요.

 

게다가 퇴계 선생님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중, 대학도(大學圖)만 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 정리를 해 보니 다른 유학서적에 대한 이해가 빨라 지더군요.


(블로그 이미지로 쓰려고 "성학십도 – 대학도"로 구글 검색하니, 한적(漢籍)으로 성학십도를 출판하는 출판사가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오호.. 흥분되네요)

 

아무튼 이렇게 하여 저의 논어집주 공부는 벌써 5개월을 넘고 있네요. 교재는 70년대에 성균관 대학에서 출간한 검정색 하드커버의 "사서(四書)" 와 전통문화연구원회에서 출간한 성백효 선생님의 "논어집주"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서는 대학장구, 논어집주, 맹자집주, 중용의 순서로 xxxxx 활자본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 용산의 뿌리서점에서 구매했는데 규모가 있는 헌책방이면 구매할 수 있을 걸로 생각 되네요. 종이 질이 그렇게 좋지 않아 책은 가벼운 반면 모두 해석서라 상당히 두껍습니다. 그래서 전 아래 그림처럼 각 경서로 구분 한 후, Kinkos에서 스프링 제본을 했습니다. 논어집주와 맹자집주는 좀 두꺼워서 각 두 권으로 나누었죠. 그리고 나니 휴대하기도 편하고 보기도 좋더군요. 흐흐

공부는 크게 3단계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1. 전통문화연구회의 사이버 서당에서 정태현 선생님의 논어집주 비디오 강의를 논어집주 (성백효 역주)로 공부하고
  2. 공부한 장(章)의 원문과 집주가 외워진 후, 논어집주 원문으로 다시 공부. 가능하면 원문에 집주보다 더 작게 쓰여진 글 (대전소류라고 하나요??)도 읽어 보려고 노력 중임
  3. 논어의 원문은 역시 집주보다 어렵더군요 (원문은 주자의 집주보다 약 1,500년 전에 쓰여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법적인 내용을 이해하려고 서울대 박기용 선생님의 "분논어(分論語)"를 함께 보고 있습니다

 

分論語’ 펴낸 언어학자 박기용 박사 ; – ‘논어의 문법’ 8개 언어로 파헤쳐

한문을 배우는 사람들에겐 오래된 속설이 하나 있다. 읽고 또 읽으면 저절로 문리(文理)가 깨쳐진다는 것. 영어를 배우는 사람들은 헌 책이 되도록 밑줄 쳐가며 문법책을 읽게 마련이지만, 한문을 읽기 위해 문법을 따로 공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혹시 이것은 한문 문법이 아직까지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오히려 동양학의 ‘신비화’에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어학자 박기용(朴起用·서울고전고대문헌연구소장) 박사는 "바로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최근 펴낸 ‘분논어(分論語)’(월인)에서 동양 최고의 고전 중 하나인 ‘논어(論語)’를 문법적으로 분석했다. 모두 20편 약 500장에 이르는 ‘논어’ 전문(全文)의 문장과 글자를 마치 수학 공식처럼 하나하나씩 풀어서 그 ‘문법적 정체’를 밝혀 놓았다.

 

‘논어’의 첫 문장인 ‘배우고 제때에 익히면 실로 기쁘지 않은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에 대한 분석은 이렇다. "’學而時習之;‘은 주어/술어이며 어조사 ‘‘는 ∑(절)를 수식하는 서법소(의문)이다. ‘/‘은 ‘‘(술어)을 수식하는 부사이며 ‘學而時習之‘는 삭감명사결구(명사절)로 구성되었다.…"

 

‘논어’와 관련된 이런 저작은 일찍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분석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논어’라는 위대한 고전이 2000년 이상 그 분절이나 글자 한두 개의 의미를 놓고 여러 학설이나 학파가 형성될 정도로 문법이 정립되지 않은 책이라면, 그의 해석 역시 또 하나의 이설을 덧붙이는 게 되지 않을까?

 

여기서 박 박사가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라틴어·희랍어·범어·타갈로그어 등 170여 종류의 언어를 해독, ‘언어학의 입신(入神)’이란 말까지 들었다. "물론 이 언어 모두를 모국어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 언어의 구문과 철자를 알아 문장을 해독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논어로 다시 돌아가자. 그는 "고문체 한어로 된 ‘논어’의 문장은 수메르어·고대애급어·아카드어·히브리어·희랍어·라전어(라틴어)·영어·국어라는 8가지 언어에 들어 있는 문법 범주와 함께 조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6편 ‘옹야(雍也)’에 나오는 ‘안회(顔回)는 그 마음이(回也其心)’라는 부분은 고대 아카드어의 전치화제화(前置話題化)로 풀어야 자연스럽게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안회의 마음(回之心)’에서 화제가 되는 ‘회()’가 한 발 앞으로 나온 형태라는 설명이다. 4편 ‘이인(里仁)’ 첫머리도 이렇게 이해하면 훨씬 쉽게 의미가 나온다. ‘이인위미(里仁爲美)’는 전통적으로 ‘마을(의 인심)이 어진 것이 아름답다’로 해석됐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문장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이를 명쾌하게 다시 푼다. "인()에 머물면 아름답다(It is beautiful to dwell in Goodness)." 즉 "어질게 살면 아름답다."는 해석이다.

 

박 박사는 "언어를 공부하며 숱한 세계의 고전들을 읽었지만 ‘논어’야말로 지고(至高)의 가치관을 지닌 탁월한 고전"이라고 말했다. 그 중에서도 ‘이인’편의 ‘아침에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는 말을 가장 아름답고도 함축적인 문장으로 꼽았다.

 

"문법을 제대로 알면 한문도 결코 어렵지 않다."고 주장하는 그는 다음 달 3일부터 서울 송파구 여성문화회관(02-2203-3330 )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논어’ 문법을 강의할 예정이다.

 

- 유석재 기자(karma@chosun.com) / 조선일보 / 2004. 1. 6(화), 22면.

 

이리하여 논어집주 한 권 공부하는데 제가 지출한 금액은 총 \ 177,000

  1. 현토 ‘논어집주’ (성백효 역주): \ 20,000
  2. 사서(四書) (성균관대학교 출판/헌채): \ 12,000
  3. 전통문화연구회 사이버서당 1년 무제한 사용권: \ 50,000
  4. 분논어 (박기용 / 월인): \ 50,000
  5. 기타 교재: 사서 강독 테이프: \ 45,000

공부를 하여 습득하게 되는 지식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라 생각합니다. 논어 서설의 끝부분에 보니까 정자(程子)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더군요.

 

程子曰 讀論語 有讀了全然無事者 有讀了後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知好之者 有讀了後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
정자가 말하였다. "논어를 읽음에, 다 읽고도 전혀 아무 일이 없는 자도 있고, 다 읽은 뒤에 그 가운데 한두 구절을 얻어서 기뻐하는 자도 있고, 다 읽은 뒤에 논어를 알고 좋아하는 자도 있고, 다 읽은 뒤에 곧 자신도 모르게 손발이 덩실덩실 춤추는 자도 있다."

 

저도 정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다 읽고 덩실덩실 춤추며 기뻐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합니다. (學而만 읽고도 이미 춤은 추고 있습니다. J )

[옮겨온 글]받아가세요!(1탄) – 갸루(ギャル) 잡지(Egg 外) 과월호

<원문 작성일: 2007년 10월 28일 @ learningculture.wordpress.com >

 

몇 해전부터 모아왔던 일본의 갸루(ギャル) 잡지 과 월호를 드립니다.

 

갸루는 영어의 소녀(Girl 또는 Gal)을 뜻하는 단어의 일본어 발음이죠. "일본의 젊은이의 하위문화(Subculture)의 하나로서 70년대 이후 새로운 패션으로 몸을 치장한 여성의 총칭"에서 현재는 이른바 갸루 패션(ギャルファッション)을 한 10~20대 전반까지의 여성을 말한 다고 합니다.

(출처: 위키피디아)

 

90년대에는 소위 "노는" 여고생의 명칭이었지만 당시 세대가 나이가 듦에 따라 현재는 여고생 이외에도 연령대를 불문하고 통칭 "갸루"로 불린다네요. 이번에 무료로 드리려고 하는 "Egg", "Cawai" 같은 잡지가 이들 문화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그럼 30대 중후반의 저는 도대체 왜 "갸루"잡지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혹시 "로리콘?"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도 왜 강구로(ガングロ-뒤에 설명 참고) 언니들 사진과 기사가 잔뜩 있는 잡지를 사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이유를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과 월호를 정리하면서 고민 해 보니 다음의 이유가 아닐까 하네요
J

 

1) 유달리 강한 하위문화에 대한 관심
   (생각해 보니 "고스 로리"에 대한 잡지도 꽤 많군요)
2) 반항적인 이미지에 대한 호기심
   (실제 반항심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3) 남자로서 갖는 여자에 대한 당연한 관심

 

머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어찌됐든, 2006년 전에 나온 잡지를 모두 처리하고자

합니다. 받아가실 수 있는 잡지는

 

1. Egg (2004년 6월호)
2. Ego (2004년 7월호)
3. Egg (2004년 7월호) – 두 권이나 있답니다.
4. Egg (2004년 8월호)
5. Ego (2004년 12월호)
6. Ego (2005년 2월호)
7. Melon (2005년 1월호)
8. Teen girl (2005년 2월호)

 

잡지는 직접 저희 사무실에 오셔서 받아 가셔야 합니다. 사무실은 삼성동에 있으며 메일 (albertk@zenitum.com)으로 연락 주시면 사무실 약도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받으시려는 분은 저희가 현재 하고 있는 무료 화상회의 서비스 팰비(http://www.palbee.com)에 등록하시고 위의 메일 주소로 등록한 아이디를 알려주시면 됩니다.

 

앞으로도 다른 많은 외국 잡지 과 월호를 보내 드리려고 합니다. 자주 블로그에 방문해 주세요. J

 

갸루의 스타일 (출처: http://ja. Wikipedia.org: 1~6, 일본고양이 블로그: 7~)

1. 코갸루 (コギャル)
90년대 중반에 시작된 유행어. 93년경 "프라이데이(Friday)" 잡지에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96년경부터 임. 갈색염색 머리(
) 혹은 메쉬를 넣은 머리와 교복을 입고 루즈삭스 (Loose Socks)에 단화 (Loafer)를 신는 것이 특징 임.

 

파생된 「중학생 갸르」를 마고갸르(マゴギャル)로 불리움. 90연대 말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교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난챳테 코갸루」도 있다. 당시는 코갸루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유행했으며 와이드쇼나 주간지를 시작으로 각종 미디어에서 코갸루 특집이 매일밤 진행되었다. 당시는 「루즈 삭스」나 「원조교제」 등과 관련되어 다양한 코갸루 이미지 등이 구축되었다. 하지만 2000연대에 들어오면서 「코갸루」이라고 하는 말 자체를 매스컴에서 서의 듣지 못하게 되었으며 지금의 거의 죽은 유행어라고 해도 될 만한 상태이다.

 

또한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 있다. 원래는, 로리타(로리)의 분위기(동안의) 소녀를 지칭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디스코텍이나 클럽이다. 업소의 입장 검문을 하는 보안요원이 심야 입장이 불가능한 여고생을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하게 된 용어이며, 어원은 「고교생(코코세-)의 Girl」, 간단히 해서 「코-갸루」이다. 그 후, 「코-갸루」→「코갸루」로 변화했고, "코"가 아이()라는 해석이 더해져 있다.

 

2. 야만바 (ヤマンバ)
어원은 야마우바(
山姥
, 산할머니).일본의 민담에 소개되는 야마우바가 대체로 백발로 손질을 하고 않고 긴머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유래했다. 강구로(ガングロ/검은 얼굴)의 화장에다 머리카락을 탈색, 또는 부분적인 착색·탈색을 한 메쉬를 한다음 흐트러진 형태 만든 머리 모양이다

 

.

3. 만바 (マンバ)
2003년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되는 유행되고 있는 갸루의 패션의 하나로, 지금은 갸루라고하면 일반적으로 만바를 칭하는 것이 되었다. 용모는 야만바가 진화한 것으로 얼굴색은 더욱 검고, 눈의 주위를 흰색 아이라인으로 크고 진하게 그린다. 입술도 흰색 계열의 립 글로스 등의 화장을 한다. 패션은 팬츠 룩보다 극단적으로 짧은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고, 스커트 자체도 원색 계열로 화려한 형태를 즐겨입는 것이 특징이다. 피카츄 등의 전신 옷 등을 걸쳐 입는 것을 키구루민(キグルミン)로 불린다. 또, 바비 인형과 같은 스타일은 반바(バンバ) 라고 불린다.

 


키구루민

4. 비빔바 (ビビンバ)
갸루 패션의 하나. 미성년자를 중심으로 만바로 하나로 B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시부야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일부는 갸루사 (ギャルサ
/갸루 서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아마 B계열의 만바라서 비빔바(우리의 비빕밥)의 명칭을 얻은 것 같습니다. J)


5. 오갸루 (ギャル(おぎゃる))
몇 일이나 목욕을 하지 않고 속옷도 바꾸지 않는 듯한, 불결한 모양을 하고 있는 갸루. 화장도 덧 칠을 반복하기 때문에 만바 이상으로 진하다. 속옷 팬티 안에 냅킨을 넣어두고 바꿔끼는 방법으로 팬티 갈아입는 것을 대신한다. 집에 별로 돌아가지 않고 외박을 자주하는 것이 특징이다.

 

6. 오네캬루 (オネギャル)
고등학교를 졸업한 갸루로서 2000년경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단어이지만 그 이후 단지 「갸루」또는 「언니계열」에 이행, 최근에는 이 말은 별로 사용되지 않은 경향. 전체적으로 심플하게 정리하는 것이 특징이고, 원색 중심의 갸루와는 외형이 전혀 다르다.

오네갸루 (おギャル)

7. B-ギャル
힙합정신으로 똘똘뭉쳐 탄생한 갸루가 B갸루이다. (B-Boy와 비슷하네요) 이들은 보통의 갸루와 달리 짙은 색의 트위스터 펌이나 블레이즈 콘로우와 같은 좀더 파격적이고 스포티한 헤어 스타일을 선호한다. 피부색 또한 보통의 갸루보다 훨씬 더 검게 태우는 것이 특징. 그리고 뉴욕 양키즈(NY) 로고나 LA와 같은 로고가 들어간 옷이나 액세서리를 즐겨 한다. 비욘세, 제이로 그리고 푸시캣 돌즈와 같은 이들 B갸루의 우상이며 최근 이효리의 스타일도 B갸루 스타일이라고 한다.

 


비갸루의 지향 스타일                  이효리의 비갸루 스타일

8. 히메갸루 (ギャル)
한국에도 매니아 층이 많다고 하는 갸루로서 19세기 로리타풍(음.. 이 내용은 다시 확인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에 로리타에 대한 내용을 써 보겠습니다)의 옷을 즐겨입는 히메(공주) 풍의 갸루이다. 보통의 갸루와 다르게 태닝을 하지 않거나 상당히 약한 것이 특징.


섹시함 보다는 사랑스러움/귀여움을 어필하는 계층으로 특징은 공주풍의 헤어스타일이다. ("일본 고양이" 블로그 주인인 히토미씨에 표현에 의하면 "언니들의 헤어 세팅 기술은 사상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른다"였습니다. J ) 그녀들의 공주풍 의상 또한 가격이 만만치 않아 정말 말 그대로의 히메(공주)가 아니고서는 추구할 수 없는 패션이다. 그러한 돈을 메꾸기 위해 캬바쿠라에 다니는 히메갸루도 많다고 한다.

 


핑크일색의 히메갸루 패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