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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15일 일요일

[옮겨온 글]죽어서야 그칠 수 있음을…

<원문 작성일: 2007년 11월 17일 @ learningculture.wordpress.com >

 

지난해 서울의 한 한문 교습회에서 나는 처음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배웠다. 율곡 이이가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며 그의 어머니셨던 신사임당는 누구인지, 아마 한국에서 중,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을 것이다. 실제 오천 원 권 지폐에도 그가 나와있으니 우리 민족에 있어서 그의 중요성은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격몽요결은 그의 나이 42세 (서기 1577년, 선조 10년)에 그가 해주(海州)에 머무를 때 학생 1, 2 명이 늘 따라와 학문에 관해 물었을 때, 스스로 스승이 될 수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또 처음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의 향방을 잡을 수 있도록 돕고자 책을 "격몽요결"을 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공부를 하는 내내, ‘이것이야 말로 정말 멋진 내용이로군!"이란 생각을 했지만 요즘처럼 논어, 대학을 공부하고 있는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학습의 지침이 되어주었다. 그러한 율곡 이이 선생이 그의 나이 16세에 그토록 사랑하단 어머니 사임당 신씨를 여의고 무려 시묘(侍墓)살이 3년을 마친 19세에 금강산에 입산, 불가에 귀의 하고자 했다 한다. 일여 년을 불경공부에 몰입하다가 20세가 된 서기 1555년에 다시 강릉으로 돌아와 스스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자경문(自警文)을 짓게된다.

 

일종의 ‘결심의 글’인 자경문은 스스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언제나 몰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약관 20세의 나이의 소년 이이의 결심을 들어 보자. (해석 출처: ‘율곡선생 글모음, 자경문, 천도책 – 임동석 옮김, 을유문화사, 2004년)

 

 

先須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未了
먼저 모름지기 그 뜻을 크게 가져 성인의 경지에까지 가는 것을 준칙(準則)으로 삼아 털끝만큼이라도 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心定者言寡 定心自寡言始
마음이 정해진 자는 말이 적어진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정하는 데는 말을 적게 하는 것으로 시발(始發)을 해야 한다.

 

時然後言 則言不得不簡
말을 해야 할 때 말을 한다면 그 말은 결국 간략하지 않으면 안된다.

 

久放之心 一朝收之 得力豈可容易 心是活物 定力未成 則搖動難安 若思慮紛擾時 作意厭惡 欲絶之 則愈覺紛擾 숙起忽滅 似不由我 假使斷絶 只此斷絶之念 橫在胸中 此亦妄念也 當於紛擾時 收斂精神 輕輕照管 勿與之俱往 用功之久 必有凝定之時 執事專一 此亦定心功夫

오랫동안 풀어 놓았던 마음을 일조(一朝)에 거두어 힘을 얻는다는 것이 그 어찌 용이(容易)하랴? 마음은 곧 살아 있는 것이어서 힘을 안정시키기에 실패하면 요동(搖動)이 일어 편안하기 어렵게 되나니 만약 사려(思慮)가 어지러울 때 염오(厭惡)의 생각이 들어 이를 끊어 버리려 한다면 오히려 더욱더 어지러움(紛擾)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함을 느끼게 되어 마치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듯 여기게 된다.
설사 끊는다 하더라도 다만 그 끊었다는 사실 자체가 흉중(胸中)에 가로놓여 있게 되어, 또한 허망(虛亡)스럽게 되고 마는 법이다. 어지러움에 당했을 때엔 정신을 수렵(收斂)하여 조용히 조관(照管)하여 그 자체에 더불어 끌려 다니지 말 것이로다.
이러한 면에 오랫동안 공부(功夫)를 들이면 끝내 안정(凝定)되고 때를 얻어 일을 집행함에 전일(專一)하게 되나니, 이 역시 마음을 안정시키는 단련법(功夫)이니라.

 

常以戒懼謹獨意思 存諸胸中 念念不怠 則一切邪念 自然不起
항상 계구(戒懼)하고 혼자 있을 때를 근신(謹愼)하는 뜻을 가슴속에 지닌 채 늘 생각하여 게으르지 않으면 일체의 사념(邪念)이 저절로 일어나지 못하느라

 

萬惡 皆從不謹獨生
만 가지 악(惡)은 모두가 근독(謹獨)하지 않음을 좇아 일어나느리라

 

謹獨然後 可知浴沂詠歸之意味
근독(謹獨) 한 후에야 욕기영귀(浴沂詠歸)의 의미를 알 수 있다.

 

曉起 思朝之所爲之事 食後 思晝之所爲之事 就寢時 思明日所爲之事 無事則放下 有事則必思 得處置合宜之道 然後讀書 讀書者 求辨是非 施之行事也 若不省事 兀然讀書 則爲無用之學
새벽에 일어나서는 아침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식후에는 낮에 해야 햘 일을 생각하며 취침 시에는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 일이 없으면 그만이려니와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합당하고 의당한 도리에서 처리할 것을 생각한다. 그런 후에 글을 읽어야 하니, 글 읽음에는 시비(是非)를 구분하여 이를 행사(行事)에 베풀지니라.
만약 일을 살피지 않고 올연(兀然)히 글만 읽는다면 이는 소용없는 학문을 하는 것이니라.

 

財利榮利 雖得掃除其念 若處事時 有一毫擇便宜之念 則此亦利心也 尤可省察
재리(財利)와 영리(榮利)는 비록 그 생각을 쓸어 제거한다 할지라도, 만약 일에 처했을 때에 일호(一毫)라도 편의(便宜)의 쪽을 택한다면 이 또한 이(利)에 대한 마음이 있는 것이니 더욱더 성찰 할 것이로다.

 

凡遇事至 若可爲之事 則盡誠爲之 不可有厭倦之心 不可爲之事 則一切截斷 不可使是非交戰於胸中
무릇 일을 만나 만약 할 만한 일에 이르러서는 곧 설실(誠實)을 다하여 이를 처리할 것이며, 염증(厭症)을 내거나 권태(倦怠)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常以行一不義 殺一不辜 得天下不可爲底意思 存諸胸中
항상 불의를 한 번만 행하고, 무고한 자를 한 번만 죽이고 천하를 얻는다 할지라도 이를 행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슴 속에 간직할 지니라.

 

橫逆之來 自反而深省 以感化爲期
횡역(橫逆)이 다가오면 스스로 반성하고 깊이 성찰(省察)하여 감화(感化)로써 기약(期約)을 삼을지니라.

 

一家之人不化 只是誠意未盡
한 집안 사람이 교화되지 않음은 이는 곧 성의를 다하지 않았음이니라.

 

非夜眠及疾病 則不可偃臥 不可跛倚 雖中夜 無睡思 則不臥 但不可拘迫 晝有睡思 當喚醒 此心 十分猛醒 眼皮若重 起而周步 使之惺惺
밤잠이나 질병이 아니라면 눕지 아니하며 비스듬히 기대지도 아니하며 비록 밤중일지라도 졸립다는 생각이 없으면 눕지 아니하며, 다만 억지로는 말 것이니라. 낮에 좋음이 오면 마땅히 정신을 깨우쳐야 하며 졸음이 그래도 십분 맹렬하여 눈을 뜨려 해도 눈꺼풀이 무거운 듯하면 일어나 몇 바퀴 걸어 다녀서 잠이 달아나도록 하여야 한다.

 

用功不緩不急 死而後已 若求速其效 則此亦利心 若不如此 戮辱遺體 便非人子
공부에 힘쓰되 느리게도 급하게도 말며 죽은 뒤에야 그치리라는 생각으로 한다. 만약 그 효과가 빨리 드러나기를 바란다면 이 또한 이심(利心)이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 다면 이는 부모께 받은 몸을 육욕 하는 것이니 곳 사람의 아들이라 할 수 없느니라.

 

그의 자경문을 읽는 사람이라면 아마 저절로 ‘나는 20세에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는가?’라는 생각을 했을 법 하다. 우리의 20세라면 이성을 만났을 것이고, 동성 친구들과의 우정을 쌓기도 했을 것이며 (주로 음주가무를 이용하여) 대학을 다니건 다니지 않건 스스로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당시 소년 이이는 어찌 보면 비정 하리만큼 스스로를 경계하고 자칫 흐트러질 수 있는 자신을 항상 채찍질 했던 것이다.

 

특히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공부’와 달리 율곡 이이 선생님은 ‘평생 학습’을 말씀하셨다. 자경문의 가장 마지막 구절을 보면 "공부에 힘쓰되 느리게도 급하게도 말며 죽은 뒤에야 그치리라는 생각으로 한다"라고 하셨다. 그가 차용하신 사이후이(死而後已)는 논어의 태백(泰伯)편의 7장 내용으로 다음과 같다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증자가 말씀하셨다.
"선비는 마임으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이 무겁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仁)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삼으니 무겁지 않은가. 죽은 뒤에야 끝나니 멀지 않은가."

 

율곡 선생은 위의 문구를 인용함으로써 "공부에는 끝이 없다" 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들어본 "평생교육"의 가장 충격적이고 강한 표현이 바로 "죽어야 끝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요즘 같이 취업을 위해서,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또는 취학을 위해서만 공부하는 우리들의 자세와는 자못 다른 모습에 머리가 숙여진다. 남들이 알아 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공부"인 것 같다.


유교의 최고 경전인 "논어"의 시작이 학(
)으로 시작하는 것이 바로 평생 해야만 하는 공부가 그토록 중요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공자께서는 첫 번째 장에서 배우는 것 자체가 기쁜 것이고 또, 같은 뜻으로 배우는 친구가 있다면 즐겁다고 말씀하셨으며 마지막으로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기분 나빠하지 말 것을 당부 하신 이유가 평생학습의 중요함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지 않을까 생각 한다.

 

이번 포스트의 제목 좀 서늘하게 "죽어서야 그칠 수 있음을…"로 시작했지만 성인의 말씀의 논리전개의 꼬리를 물어 한 바퀴를 돌아 보니 다음과 같다.


결국 죽어서야 그칠 수 있는 것은 즐거움이니 제목 또한 밝기만 하다. J

[옮겨온 글]論語學習記: 위정(爲政)으로 들어가면서

<원문 작성일: 2007년 10월 28일 @ learningculture.wordpress.com >

 

논어집주(論語集注)를 시작한지 어언 5개월. 드디어 爲政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전에 어떤 블로그에서 하루에 한 장(章)씩 공부하면 학이(學而)가 16장이니 한 달이면 위정(24장)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내용을 본적이 있습니다. 이런 전 너무 머리가 나쁜 것일까요? 학이만 5개월이니. 언제나 길기만 한 논어집주를 언제나 끝낼지 정말 까마득하군요.

박수동 선생님이 그리신 "오성과 한음"이라는 명령만화를 기억하는 제 나이또래 분들이 계실 겁니다. 오성과 한음이 책 한 권을 끝내면 서당에서 "책씻이"라는 의식이 있었는데 오성이 어머니가 단술을 만들어 서당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장면이 기억 납니다. 겨우 학이를 끝낸 지금 전 그 단술이 너무 마시고 싶네요 J (근데 단술이 머죠? 식혜인가요?)

 

율곡 이이 선생님이 지으신 격몽요결(擊蒙要訣)의 "독서(讀書)"편을 보면

 

先讀小學於事親敬兄忠君弟長隆師親友之道一一詳玩而力行之
次讀大學及惑問於窮理正心修己治人之道一一眞知而實踐之
次讀論語於求仁爲己涵養本源之功一一精思而深體之
次讀孟子於明辨義利遏人慾存天理之設一一明察而擴充之

次讀中庸於性情之德推致之功位育之妙一一玩索而有得焉
次讀詩經於性情之邪正善惡之褒戒一一潛繹感發而懲創之
次讀禮經於天理之節文儀則之度數一一講究而有立焉
次讀書經於二帝三王治天下之大經大法一一領要而遡本焉
次讀易經於吉凶存亡進退消長之幾一一觀玩而窮硏焉
次讀春秋於聖人賞善罰惡抑揚操終之微辭奧義一一精硏而契悟焉

 

五書五經循環熟讀理會不已使義理日明而宋之先正所著之書如近思錄家禮心經二程全書宋子大典語類及他性理之設宜間間精讀使義理常常浸灌吾心無時間斷而餘力亦讀史書通古今達事變以長識見若異端雜類不正之書不可頃刻披閱也

 

凡讀書必熟讀一冊盡曉義趣貫通無疑然後乃改讀他書不可貪多務得忙迫涉獵也


요약하면 우선 배우고자 하는 이(學者)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공부를 해야 한답니다..

 

소학 → 대학 → 논어 → 맹자 → 중용 → 시경 → 예경 → 서경 → 역경 → 춘추

 

위의 5서 5경을 순환숙독 (돌려가며 익숙히 읽기)을 해야 하고, 성리학의 영향이라서 그런지 근사록(近思錄), 가례(家禮), 심경(心經), 이정전서(二程全書), 주자대전(朱子大全), 어류(語類), 및 기타 성리학 관련 서적을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휴~)

여력이 된다면 또, 역사책을 읽어 옛날과 지금에 일어난 일에 통달하여 식견을 신장시켜야 할 것이랍니다. (다행이 史記를 보고 시작했군요.. 하지만 여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단잡류(異端雜類, 성리학자들이니 불교서적이겠죠?)의 책은 잠깐이라도 보지 말아야 한답니다.

무릇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한 책을 익숙히 읽어 그 의취(의취)을 깨달아 꿰뚫어 통달하고 의심이 없은 뒤에야 다시 다른 책을 읽어야 하며, 많이 읽기를 탐하고 얻기를 힘써서 바삐 섭렵(涉獵)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의 공부 방법을 보아하니, 우선 동몽선습과 격몽요결을 읽었다는 건방짐으로 소학은 쉽게 무시해 버리고 주제 넘게 논어집주에 도전 지금까지 고분고투하고 있습니다. 주희(朱熹) 선생님의 자세한 해석모음(集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어리석어 내용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므로 우연히 헌책방에서 대학장구(大學章句)을 구매하여 짧은 경문(經文)만 읽었습니다. 그나마 경문을 읽고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이르는 내용을 요약하고 컨닝 페이퍼로 쓰고 나니 논어집주 볼 때 좀 도움이 되더군요.

 

게다가 퇴계 선생님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중, 대학도(大學圖)만 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 정리를 해 보니 다른 유학서적에 대한 이해가 빨라 지더군요.


(블로그 이미지로 쓰려고 "성학십도 – 대학도"로 구글 검색하니, 한적(漢籍)으로 성학십도를 출판하는 출판사가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오호.. 흥분되네요)

 

아무튼 이렇게 하여 저의 논어집주 공부는 벌써 5개월을 넘고 있네요. 교재는 70년대에 성균관 대학에서 출간한 검정색 하드커버의 "사서(四書)" 와 전통문화연구원회에서 출간한 성백효 선생님의 "논어집주"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서는 대학장구, 논어집주, 맹자집주, 중용의 순서로 xxxxx 활자본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 용산의 뿌리서점에서 구매했는데 규모가 있는 헌책방이면 구매할 수 있을 걸로 생각 되네요. 종이 질이 그렇게 좋지 않아 책은 가벼운 반면 모두 해석서라 상당히 두껍습니다. 그래서 전 아래 그림처럼 각 경서로 구분 한 후, Kinkos에서 스프링 제본을 했습니다. 논어집주와 맹자집주는 좀 두꺼워서 각 두 권으로 나누었죠. 그리고 나니 휴대하기도 편하고 보기도 좋더군요. 흐흐

공부는 크게 3단계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1. 전통문화연구회의 사이버 서당에서 정태현 선생님의 논어집주 비디오 강의를 논어집주 (성백효 역주)로 공부하고
  2. 공부한 장(章)의 원문과 집주가 외워진 후, 논어집주 원문으로 다시 공부. 가능하면 원문에 집주보다 더 작게 쓰여진 글 (대전소류라고 하나요??)도 읽어 보려고 노력 중임
  3. 논어의 원문은 역시 집주보다 어렵더군요 (원문은 주자의 집주보다 약 1,500년 전에 쓰여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법적인 내용을 이해하려고 서울대 박기용 선생님의 "분논어(分論語)"를 함께 보고 있습니다

 

分論語’ 펴낸 언어학자 박기용 박사 ; – ‘논어의 문법’ 8개 언어로 파헤쳐

한문을 배우는 사람들에겐 오래된 속설이 하나 있다. 읽고 또 읽으면 저절로 문리(文理)가 깨쳐진다는 것. 영어를 배우는 사람들은 헌 책이 되도록 밑줄 쳐가며 문법책을 읽게 마련이지만, 한문을 읽기 위해 문법을 따로 공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혹시 이것은 한문 문법이 아직까지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오히려 동양학의 ‘신비화’에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어학자 박기용(朴起用·서울고전고대문헌연구소장) 박사는 "바로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최근 펴낸 ‘분논어(分論語)’(월인)에서 동양 최고의 고전 중 하나인 ‘논어(論語)’를 문법적으로 분석했다. 모두 20편 약 500장에 이르는 ‘논어’ 전문(全文)의 문장과 글자를 마치 수학 공식처럼 하나하나씩 풀어서 그 ‘문법적 정체’를 밝혀 놓았다.

 

‘논어’의 첫 문장인 ‘배우고 제때에 익히면 실로 기쁘지 않은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에 대한 분석은 이렇다. "’學而時習之;‘은 주어/술어이며 어조사 ‘‘는 ∑(절)를 수식하는 서법소(의문)이다. ‘/‘은 ‘‘(술어)을 수식하는 부사이며 ‘學而時習之‘는 삭감명사결구(명사절)로 구성되었다.…"

 

‘논어’와 관련된 이런 저작은 일찍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분석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논어’라는 위대한 고전이 2000년 이상 그 분절이나 글자 한두 개의 의미를 놓고 여러 학설이나 학파가 형성될 정도로 문법이 정립되지 않은 책이라면, 그의 해석 역시 또 하나의 이설을 덧붙이는 게 되지 않을까?

 

여기서 박 박사가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라틴어·희랍어·범어·타갈로그어 등 170여 종류의 언어를 해독, ‘언어학의 입신(入神)’이란 말까지 들었다. "물론 이 언어 모두를 모국어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 언어의 구문과 철자를 알아 문장을 해독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논어로 다시 돌아가자. 그는 "고문체 한어로 된 ‘논어’의 문장은 수메르어·고대애급어·아카드어·히브리어·희랍어·라전어(라틴어)·영어·국어라는 8가지 언어에 들어 있는 문법 범주와 함께 조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6편 ‘옹야(雍也)’에 나오는 ‘안회(顔回)는 그 마음이(回也其心)’라는 부분은 고대 아카드어의 전치화제화(前置話題化)로 풀어야 자연스럽게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안회의 마음(回之心)’에서 화제가 되는 ‘회()’가 한 발 앞으로 나온 형태라는 설명이다. 4편 ‘이인(里仁)’ 첫머리도 이렇게 이해하면 훨씬 쉽게 의미가 나온다. ‘이인위미(里仁爲美)’는 전통적으로 ‘마을(의 인심)이 어진 것이 아름답다’로 해석됐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문장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이를 명쾌하게 다시 푼다. "인()에 머물면 아름답다(It is beautiful to dwell in Goodness)." 즉 "어질게 살면 아름답다."는 해석이다.

 

박 박사는 "언어를 공부하며 숱한 세계의 고전들을 읽었지만 ‘논어’야말로 지고(至高)의 가치관을 지닌 탁월한 고전"이라고 말했다. 그 중에서도 ‘이인’편의 ‘아침에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는 말을 가장 아름답고도 함축적인 문장으로 꼽았다.

 

"문법을 제대로 알면 한문도 결코 어렵지 않다."고 주장하는 그는 다음 달 3일부터 서울 송파구 여성문화회관(02-2203-3330 )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논어’ 문법을 강의할 예정이다.

 

- 유석재 기자(karma@chosun.com) / 조선일보 / 2004. 1. 6(화), 22면.

 

이리하여 논어집주 한 권 공부하는데 제가 지출한 금액은 총 \ 177,000

  1. 현토 ‘논어집주’ (성백효 역주): \ 20,000
  2. 사서(四書) (성균관대학교 출판/헌채): \ 12,000
  3. 전통문화연구회 사이버서당 1년 무제한 사용권: \ 50,000
  4. 분논어 (박기용 / 월인): \ 50,000
  5. 기타 교재: 사서 강독 테이프: \ 45,000

공부를 하여 습득하게 되는 지식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라 생각합니다. 논어 서설의 끝부분에 보니까 정자(程子)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더군요.

 

程子曰 讀論語 有讀了全然無事者 有讀了後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知好之者 有讀了後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
정자가 말하였다. "논어를 읽음에, 다 읽고도 전혀 아무 일이 없는 자도 있고, 다 읽은 뒤에 그 가운데 한두 구절을 얻어서 기뻐하는 자도 있고, 다 읽은 뒤에 논어를 알고 좋아하는 자도 있고, 다 읽은 뒤에 곧 자신도 모르게 손발이 덩실덩실 춤추는 자도 있다."

 

저도 정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다 읽고 덩실덩실 춤추며 기뻐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합니다. (學而만 읽고도 이미 춤은 추고 있습니다. J )